유학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구현하는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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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구현하는 학문
  • 손세제 <철학박사>
  • 승인 2018.06.2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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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 유학
유학은 ‘인’의 도덕, 충(忠)
인간다움 구현하는 실천학
홍주향교 유교아카데미 수업 광경.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은 뭘까?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닐까? 부귀와 공명은 ‘사람다움’을 이루는 데 충분조건이기는 해도 필요조건은 아닐 것이다. 유학은 바로 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다움(species)’의 실현을 종지(宗旨)로 하던 학이다. 이것이 공자가 이루고자 했던 최고선, 이상이자 가치인 ‘인(仁)’의 도덕이다. 그런데 ‘사람다움’을 이루려면 나도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람’으로 인정해줘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를 떠나서는 ‘사람다움’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군자’는 바로 이 사람다움을 이룬 사람이다.

사람이 되려고 하는 노력, 이것을 ‘충(忠)’이라고 한다. ‘진기(盡己)’ 말 그대로 나를 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다 사람이 되었을 때 느끼는 즐거움을 바탕으로 남에게도 똑같이 하는 것, 이것을 ‘서(恕)’라고 한다. ‘추기급인(推己及人)’ 내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남이 나에게 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으면 나도 똑 같이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 것, 이것이 ‘서’의 마음이다.

보통 이런 마음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자식이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람’ 구실을 하고 ‘사람’ 대접을 받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모든 부모의 공통된 마음이다. 공자는 이런 마음을 모든 인류에게 펼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펼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 타고난 자질과 근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다움’은 때와 장소에 맞게 행위할 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환경이나 처지가 변하면 그에 맞는 ‘사람다움’을 다시 이루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조금 전에 사람다움을 이루기 위해 내가 행한 도덕이 상황이 변한 지금에도 여전히 타당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사람다움’이라는 것이 한번 도달하면 무한히 지속되는 ‘정태적인 존재’가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 수시로 변화는 ‘유동적인 상태’라는 데에 기인한다.

그래서 ‘사람다움’을 펼치더라도 때와 장소에 적의(適宜)하게 펼치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예(禮)’이다. ‘예’를 지키면 대과(大過)가 없다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다움’을 쥬지하기 위해서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잠시도 쉼 없이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는 자질과 근기를 키우고 타고난 자질을 갈고 닦는 방법을 연하하는 ‘학(學)’을 매우 강조했다. 제자 가운데 그 어떤 존재감도 없었던 안연(顔淵)을 최고의 제자로 여기고 늘 친애했던 것도 그의 ‘호학(好學)’하는 습관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공자의 학문에서는 ‘학’과 더불어 ‘행(行)’이 강조됐다. 그리고 그에 수반하여 ‘충(忠)’ ‘신(信)’ ‘명(命)’의 덕목이 강조됐다. 사람다움을 이루려면 그것을 알고 실천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 진정성을 믿을 수 있도록 성실함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다움은 나와의 관계(忠)에서도 시작되지만 결국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恕)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禮) 시행해야 한다. 이 ‘학’을 이루는 것이 ‘군자’의 소명이라고 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선비는 바로 이 ‘사람다움(道)’의 실현을 하늘의 명이자 삶의 목적으로 알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정진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행’은 ‘학’과 더불어 삶을 떠받치는 양대 덕목이었다. 그래서 ‘사람다움’을 이루는 데 뜻을 둔 선비들은 성군(聖君)이 나타나 나라가 평화로울 때에는 조정에 나아가 이 ‘도’를 펼치고자 하였고, 암군혹리(暗君酷吏)가 국정을 농단할 때에는 그것의 실현이 여의치 않음을 알고, 향리에 물러나 민생과 고통을 나누며 불의(不義)의 정치에 저항하는 한편, 사회의 기강(道)을 바로세우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의 ‘학’은 ‘행’의 도덕에서 유리(遊離)된 적이 없었다. ‘부유하게 살기보다 사람답게 살기를 원했고(捨生取義)’, ‘나라에 위험이 닥칠 조짐이 보이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졌으며(見危致命)’,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도 도리(事理)에 어긋난 것이라면 결코 취하지 않았다(見利思義)’. ‘사람다움’, ‘사람다운 삶의 구현’은 하늘이 그들에게 부여한 명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知天命) 그것의 실현에 동참하는 것을 목숨을 연명하는 것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나라가 어려울 때 도처에서 선비들이 거의(擧義)했던 것도 평소 익힌 바의 ‘학’을 실행에 옮기기 위함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학’은 곧 ‘행’이었고 ‘행’은 곧 ‘학’이었다. 그 ‘학’과 ‘행’이 사회를 건전하게 하고 암군혹리가 무너뜨린 사회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한 힘(시회복원력)이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공자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경전에도 없고 도리에도 맞지 않는 것을 최고의 덕목인 양 찬미하며, 그것을 이루는 데에만 온 힘을 다하는 부류들이 생겨났다. 인간다운 삶이 파회(破毁)되는 지경에 처했는데도 눈과 귀와 입을 닫고 일체의 말과 행동을 삼가고, ‘안빈낙도(安貧樂道)’ ‘음풍농월(吟風弄月)’ ‘북창청풍(北窓淸風)’ 하는 것을 선비의 도리라고 하면서, 오직 명철(明哲)과 보신(保身)을 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이런 무리들이 권력(勢道勸力)에 빌붙어 국정을 농단하고 민생을 파탄 낸 것이다. 이것이 유학의 도일까?

이로 인해 민심은 흉흉해졌고, 기댈 곳이 없는 백성들은 각종 변란을 일으키며 정치의 본연(仁)으로 되돌아갈 것을 호소했지만, 명리(名利)를 쫓는 데 급급한 부유(腐儒)들은 서로 앞다퉈 변란을 진압하며 누대에 걸쳐 일궈온 향촌의 질서(‘孝悌’)를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훼시켜 버렸다. 이에 국망을 경고하고 ‘인’의 도덕을 역설하는 수많은 선비들의 호소와 거의(擧義)가 도처에서 일어났지만, 권력에서 배제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버팀목이 무너지자 부유들은 매판세력들과 손잡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한다며 외세를 끌어들였다. ‘지록위마(指鹿爲馬)’가 난무했다. 이제 조정은 백성의 조정이 아니었고 국가는 구원의 방주가 아니었다. 나라가 망할 적에는 반드시 안으로부터 망한다고 했다. 이것이 과연 유학 때문일까?

유학이 제 역할을 하던 시대에는 이른바 ‘도의(道義)의 정치’가 행해졌기 때문에 암군혹리(暗君酷吏)가 국정을 농단해도 사회에는 복원력이 있었다. 그러나 도의(道義)의 정치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가 없다. 인간다움을 실현해야 할 권력을 이재(理財)와 명리(名利)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부유(腐儒)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기타 거기에 빌붙어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모르고 시세(時勢)의 동향도 살피지 못하면서 무조건 자기 생각만 옳다 하고, 옛 것을 따르기만 하면 군자라도 되는 양 시문(詩文)이나 읊조리며 오늘날의 세상에는 맞지도 않는 주의·주장과 공담·허례허식만 늘어놓았던 자들(俗儒)에 대해서는 말할 만한 가치도 없다. 그들은 선비가 아니라 선비의 적·인간다움의 적·공문(孔門)의 적·유학의 적이다.

이에 대해 국망이 다가오자 선비의 삶(인간다움)을 지키고자 떨쳐 일어나 ‘불의(不義)’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선비된 자가 가야 할 길(命)이 정해져 있다면 사생(死生)은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가서 죽게 된다 하더라도 선비 된 자로서 나라와 함께 망하는 것이 도리다’. 국망이 현실화되자 이내 자결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더 이상 어찌 해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목숨을 끊은 것이다. 선비 된 자가 시세(時勢)에 영합하며 구차하게 삶을 연명해 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목숨을 끊어(殉節) 이제까지 지켜왔던 지조를 보존하는 것이 선비된 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도리다. ‘선비 된 자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을 줄 수는 없다(士可殺, 不可辱)’고 했던가? 그들의 삶이 더욱 고결해 보이는 이유다.

유학은 인간다움, 인간다운 삶, 인간답게 사는 삶, 또 그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 국가의 건설, 또 그런 삶이 가능하도록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정치라는 행위를 통해 구현하려 했던 학문이다. 유학은 인간다움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론)학이 아니다. 인간다움을 실제에 구현하는 실천학이다. 자신을 인간으로 대했을 때 느끼는 즐거움을 타인에게도 똑같이 펼쳐서 함께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가고자 한 것, 이것이 유학의 종지(宗旨)다. 그래서 평화로운 시대에는 정치계에 나아가 ‘인간다움’을 실현하려 했고, 혼란한 시대에는 타인과 함께 고통을 감내하며 떨쳐 일어나 불의(不義)에 항거(抗拒)했던 것이다. 유학에서는 실천(行)이 진리를 인식하는 수단이다. 그것 때문에 국망 기에 수많은 선비들이 ‘사생취의’ ‘견위수명’ ‘견리사의’를 외치며, ‘아침에 도를 이루었다는 말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인 관계를 잘 하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삶’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처세(處世)에 능한 삶일 뿐이다. 처세에 능한 사람들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지 않는다. 상대의 비유를 맞춰 힘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 혹은 명리(名利)를 취할 방도만 찾는다. 상대가 흥하든 망하든 그건 관심 사안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가치(인간다움)의 구현보다 개인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더 중요한 관건이다.

오늘날 충서(忠恕) 도덕은 사라졌지만 예(禮)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다움이 사라진 세상에서 펼치지는 예(禮)가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친구 간에도 속을 터놓을 수 없고 가족 간에도 비밀스런 일은 혼자 간직하는 것이 더 좋다고 믿는 세상이다. 그것은 유학의 도가 아니라 유학의 생명을 앗아가고 단축시키는 반유학적인 것이다.

‘예(禮)가 사람을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 그 예(禮적의함)를 부려 불의(不義)에 눈을 감게 한 대마왕(禮敎)이 사람을 잡아먹은 장본이다’고 일갈한 현대 중국의 어느 학자의 말이 들린다. 선비들의 의기가 넘쳐 났던 홍주의 향교에서 유교아카데미 강좌에 즈음해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인간다움의 구현을 위해 혹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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