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은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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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은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
  • 갈산고등학교 조원찬 교사
  • 승인 2018.07.0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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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 유학<3>
①옥암리 출토 찍개. ②구항면 태봉리 고인돌. ③신금성터 출토 세발그릇.

홍성 뱃길 중앙과 연결되지만 수탈도 많아
군·면 통·폐합령 따라 홍성군 권역 형성해
구석기 후기부터 하천 주변에서 생활 시작


■ 자연환경
홍성의 자연환경은 우선 육지와 바다가 어우러져 있고, 오서산과 가야산을 제외하면 대부분 해발 50m 내외의 낮은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로 삽교천 주변에 형성된 예당평야가 북쪽으로 넓게 자리하고 있다. 그 중에서 산은 동남쪽과 북서쪽이 해발 400m 내외로 높고 북동쪽과 서남쪽이 해발 100m 내외로 낮다. 냇물은 삽교천과 무한천처럼 북쪽으로 흐르는 것도 있고, 와룡천과 광천천처럼 서쪽으로 흐르기도 한다.

홍성의 기후는 대체로 겨울 1월 연평균기온이 -3℃ 이하다. 온대 기후인 것 같지만, 냉대 기후가 시작되는 곳이다. 따라서 홍성을 경계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의 비율이 많아진다. 아울러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ㅡ’자형의 집에 가깝게 지어지고,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ㅁ’자형의 집이 발달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대나무의 북방한계선과 연결돼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굵기도 굵어지면서 대나무의 생육조건도 좋아진다.

홍성의 교통은 바다와 가까워 일찍부터 뱃길이 발달했다. 그러나 안면도와 태안반도의 서쪽 안흥량을 지나는 길이 풍랑이 세고 암초가 많아 뱃길이 험난했기 때문에 천수만으로 이어지는 뱃길을 많이 이용했다. 그래서 안면도가 섬이 아니었지만 섬이 된 사연, 천수만에서 가로림만을 잇기 위한 ‘굴포운하’에 얽힌 사연 등이 있게 됐다. 그러나 홍성의 뱃길은 중앙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순기능이 있는 반면, 왜구나 이양선의 침입이 있거나 중앙 정부와 권세가들의 수탈이 내포지역에 많아지게 된 역기능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 지명
지명(地名)은 마을이나 지방, 산천, 지역 따위의 이름으로서 지역의 정서와 정체성을 담고 있다. 따라서 지명은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백제에 편입되기 전 원삼국시대에 홍성지역은 마한의 영역에 속했다. 이때 홍성지역에는 소위건국, 감해비리국, 점비리국, 사로국 등이 있었을 것으로 알려졌다. 백제시대에는 ‘결기군’(현재 결성면 일대)과 그 영현이었던 ‘사시량현’(현재 장곡면 일대), 마시산군(현재 덕산면 일대)의 영현이었던 ‘우견현’(현재 갈산면 일대)이 있었고, 신령스러운 산으로서 ‘오산’(현재 오서산)이 있어 산악숭배 신앙을 통해 민심을 결집시키는 구심적 역할을 했다.[백제 멸망 후에는 대략 웅진도독부의 지심주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 체제를 정비하면서 홍성지역에는 결성군(백제의 결기군)과 그 영현이었던 신량현(백제의 사시량현), 이산군의 영현이었던 목우현(백제의 우견현) 등을 설치했고, 오산은 오서악으로 명칭을 바꿔 중사에 편제했다.

후삼국시대에 처음 ‘운주(運州)’로 불린 홍성읍 지역은 995년(성종 14) 도단련사가 파견되었고, 1012년(현종 3) 지주사가 파견됐다. 1018년(현종 9) 홍주로 지명을 바꾸고 결성군, 고구현(현재 갈산면 일대), 여양현(현재 장곡면 일대)을 비롯한 3군 11현을 관할했다. 1356년(공민왕 5)목으로 승격되었다가, 1368년(공민왕 17) 지주사로 강등되었고, 1371년(공민왕 20) 다시 목으로 승격됐다.

조선시대에 홍주는 1413년(태종 13)에 홍주목이 설치되면서 태안·서산·면천의 3개 군을 영군으로, 해미·당진·덕산·예산·청양·결성·보령·대흥 등 8개현을 영현으로 삼았다. 1457년(세조 3) 홍주목에 진관이 설치되면서 서천, 비인, 남포, 홍산, 보령, 청양, 대흥, 덕산, 결성을 관할했다가, 그 후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1481년(성종 12) 사이에 서천·서산·태안·면천·온양 등의 5개 군과 평택·홍산·덕산·청양·대흥·비인·남포·결성·보령·아산·신창·예산·해미·당진 등의 14개 현을 관할하게 됐다. 1895년(고종 32) ‘홍주목’은 ‘홍주부’로 승격됐다가, 1896년(건양 원년) ‘13도제’로 개편됐을 때에는 충청남도 ‘홍주군’이 되었다.

일제가 강제 점령한 후 내린 1914년 군·면 통·폐합령에 따라 홍주군은 결성군, 보령군 청소면의 청촌·양촌·음촌·석포리 일부, 오천군의 천북·창리·구창동·두실동·벌리·덕두리 일부, 청양군 상서면의 하강리 일부, 대흥군 일남면의 화암리 일부, 덕산군 덕산면의 수촌리 일부 등을 병합하고, 홍주의 ‘홍’자와 결성의 ‘성’자를 합해 홍성군 권역을 형성했다. 그렇지만 얼방·흥구향·화성·상전 등 4개 면이 청양군으로 넘어갔고, 고남상도와 고남하도의 2개 면은 합쳐 고도면으로 바꿨다.

지명의 변천 과정을 거듭한 홍성지역은 1941년 홍주면이 홍성읍으로, 1942년 광천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983년 2월 홍동면 구룡리를 홍성읍에, 홍동면 월림·대평·운용리를 광천읍에, 서산군 고북면 대사리와 결성면 와리를 갈산면에, 결성면 중리를 서부면에, 홍북면 내법리를 홍성읍으로 각각 편입해 홍성·광천읍, 갈산·결성·구항·금마·서부·은하·장곡·홍동·홍북면 등 2개 읍 9개면으로 개편됐다. 2017년 8월 1일 홍북면이 홍북읍으로 승격해 3읍 8면 150개 법정리가 됐다.

■ 역사와 문화유산
홍성지역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까? 홍성읍 옥암리 유적에서 발견된 찍개와 밀개, 광천읍 상정리 유적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에 의하면 홍성에는 구석기시대 후기부터 사람들이 살면서 홍성천, 학산천, 삽교천, 무한천 주변에서 식물의 채집과 함께 물고기와 짐승을 잡아먹으며 생활했다. 청동기시대에는 생활환경을 더욱 확대하며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농경을 발전시켰다. 홍성지역의 각 하천 주변에서 발견되는 돌널무덤과 고인돌, 돌칼, 돌화살촉, 돌도끼, 홈자귀, 삼각형 돌칼, 조개더미 등이 이 시기의 유적·유물들이다.

4세기 전반 홍성지역은 마한을 떠나 한성 백제와 교류했다. 결성 신금성터에서 발견된 세발토기,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등이 이를 대변한다. 웅진 백제시대에는 지리적으로 백제의 왕도와 가깝고, 중국과의 외교 관계 및 고구려에 대한 방어와 공격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결성 성호리에서 발견된 굴식 돌방무덤으로 확인할 수 있다. 베일속의 홍성역사,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은 어디일까? 홍성설을 비롯한 부안설, 서천설, 연기설 등이 있는데, 그 중 홍성의 주류성은 장곡면 산성리의 장곡산성을 중심으로 학성산성과 그 주변 일대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백제 사시량현과 관련된 ‘사시’, ‘사시량’, ‘사라’ 등의 글자를 새긴 기와 조각들이 발견돼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통일신라시대의 문화유산으로는 용봉사 마애불이 남아 있는데, 이는 799년 향도(香徒) 관인(官人) 장진 대사(大舍, 제12관등, 지방관)와 대백사(大伯士) 원오 법사가 일체의 중생을 구하기 위해 세웠다는 명문이 남아 있어 더욱 주목되는 불상이다. 신라 하대에 홍성지역에서 지방 세력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홍성지역이 다시 한 번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던 것은 나말려초의 전환기였다. 934년 왕건과 긍준 사이에서 벌어진 운주 전투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긍준은 홍규로 이름을 바꾸고, 그의 딸은 태조의 12번째 왕비인 흥복원부인이 됐다. 그 결과 고려 초부터 불교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오관리 당간지주,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상하리 미륵불, 광경사지 삼층석탑, 광경사지 석불좌상 등이 있고, 왕사 및 국사에 오른 보우 선사가 홍주 출신이다. 홍성의 역사를 지켜 본 홍주읍성은 홍성읍 오관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가 남아있다. 홍성천과 월계천이 해자(垓字, 성 주위에 만든 물길) 역할을 한다. 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홍주읍성의 기록을 처음 찾을 수 있다.

1451년(문종 1)에 고쳐 쌓은 후 1823년(순조 23)과 1870년(고종 7)에 크게 고쳐 쌓아 오늘에 이른다. 1870년에 고쳐 쌓았을 때는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모범적 사례로 높이 평가해 조양문(朝陽門, 동문), 경의문(景義門, 서문), 망화문(望華門, 북문), 홍주아문(洪州衙門) 등의 현판을 직접 써서 내려줬다.

927년 긍준과 왕건의 전투, 1230년 최우와 최향의 전투, 1594년(선조 27) 광해군의 군사 모집, 1596년 이몽학의 난, 1866년 이후의 병인박해, 1894년 동학농민군의 홍주읍성 전투, 1895년과 1906년의 홍주의병 등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홍주읍성은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홍주읍성 성곽, 조양문, 안회당, 홍주아문, 여하정이 사적 231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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