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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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 이야기
  • 최복내 칼럼위원
  • 승인 2018.10.2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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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운다. 엄마는 아이를 달래고 있다. 소꼽을 쥐어 주기도하고 무섬을 주면서 타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엄마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그러자 아이는 더 큰 소리로 운다. 엄마는 큰소리로 호랑이가 왔다고 아이에게 타이른다. 그러자 아이는 더 큰소리로 운다. 엄마는 그제야 생각난 듯이 벌떡 일어선다. “자 곶감 여기 있다. 어서” 엄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친다. 사립문 밖에서 호랑이가 동정을 엿듣고 있다가 깜짝 놀란다. 대체 곶감이란 무엇일까. 호랑이를 들먹여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이 아닌가. 호랑이는 슬그머니 겁이 났다. 이 세상에 곶감이란 놈이 제일 무서운 놈이구나.

무서움은 사람에 따라 직업에 따라 혹은 환경에 따라 그때마다 빛깔이 다른 곶감으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에게는 귀에 소근 거려주는 달콤한 한마디가 뒷날 돌이킬 수 없는 쓰라린 곶감의 함정일 수 있겠다. 곶감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호랑이가 만약 알고 있었더라면 그 날 밤 아이 우는 집의 사정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라던가. 무서움에 떨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갖는 곶감의 성질을 잘 다뤄 나가야 할 것이다.

공직을 떠난 지도 어언 십여 년, 젊어 패기에 넘치던 한때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는 용맹으로 행정고시에도 도전해 보기도 했다. 이제 정년을 뒤로 하고 비교적 여유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이 시점에서는 어느덧 나도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있는 한 마리 호랑이가 아닌가. 내가 겁내는 곶감은 무엇인가?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급속하게 변화해 온 생활로 인한 무소유의 두려움과 공직 이후의 생활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불투명한 미래가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곶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감의 상실일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중국 춘추전국 시대 노나라의 공자는 “나는 15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가 되어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고, 40세가 되서는 판단에 혼돈을 일으키지 않았고, 50세가 되서는 천명을 알았고, 60세가 되어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고, 70세가 되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대로 해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고 설파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인(仁)과 효(孝)를 근본으로 교육과 후계자 양성에 평생을 바쳐 온 공자의 사상을 가까이 하면서 처음 공직에 몸담을 때의 용맹과 자신감으로 무장한다면 무서운 곶감은 오히려 호랑이를 더 무서워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감사의 단위는 물질의 풍요와 영육의 평화나 이상향에 대한 보장된 약속 같은 데서 발견되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감사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 예컨대 불행이나 전쟁이나 재앙이 뒤흔드는 인생의 시련 속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발견되어진다. 난파선에서 유리되어 칠흑 같은 밤바다를 표류하다가 우연히 붙잡히는 한 조각의 나무는 참으로 감사해야 할 고마움의 단위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큰 불행이나 재난에 처했을 때 실의나 공포로 말미암아 이 감사의 단위를 쉽사리 간과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더욱 큰 불행을 불러들이거나 혹은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을 내려버리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최복내<숲속의힐링센터대표·숲 해설가·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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