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장군의 기상을 이어받은 신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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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의 기상을 이어받은 신기마을
  • 취재=김옥선/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11.20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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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있는 농촌마을 사람들<30>

농촌마을 희망스토리-갈산면 행산리 신기마을
새터라고도 불리는 신기마을 전경.
마을회관에 모여 구수한 입담을 나누는 마을주민들.

갈산면 행산리 신기마을은 새터라고 부른다. 박대식 이장에 의하면 원래 함박골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도둑이 많이 들자 김해 김씨가 정착해 살기 시작하면서 가시덤불과 칡넝쿨밖에 없던 곳을 새로 닦아 만들어 새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가구 수는 54가구이며 이 중 2가구가 귀촌했다. 마을 대부분이 고령층에 속하며 가장 낮은 연령대가 50대다. 마을 구성원 대부분이 벼농사를 지으며, 축산업에 임하는 가구는 6가구다.

신기마을 동쪽으로는 이동, 북쪽으로는 상촌, 서쪽으로는 사혜, 남쪽으로는 목과와 원와마을이 위치한다. 마을 동쪽에는 철마산 줄기가 서쪽으로 내려와 낮은 구릉을 형성하고 와룡천까지 작은 농경지와 함께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 형상이 배의 형국이라 하여 농사를 지으면 백석을 하지 못한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한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뚫려 결국 배가 침몰한다 해 우물을 파지 않고 살아왔다. 이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옛날부터 장군이 태어날 형국이라 전해내려 오는데 백야 김좌진 장군이 신기마을에서 1889년 태어났다.

1992년 성역화 사업으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를 복원하고 백야사를 지었다. 생가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목조기와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됐다. 백야사는 김좌진 장군의 사당으로 1991년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면서 생가복원과 주변정화와 함께 조성됐다. 재호는 백야 김좌진 장군이 와룡천에서 무예를 연마했다는 의미를 부각시켜 와룡제(臥龍濟)라 했다. 매년 음력 12월 25일에 제향을 올리다가 2004년부터 백야 김좌진 장군 전승기념 백야축제가 열리는 10월 25일에 제향을 모신다. 현재는 사당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행산리 신기마을 박대식 이장.

박대식 이장은 “아직도 다른 지방에 가면 김좌진 장군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마을 소득 창출과도 이어지는 사업이 진행됐으면 한다”고 말한다. 이어 “행정에서 눈 감고 있는 곳이 갈산이다. 생가지 주변에 관광자원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이 많은데 개발이 되지 않고 있다”며 “한용운 생가지까지 이어지는 포장이 안 된 도로에 대한 포장도 필요하고 마을 노인회나 부녀회가 관광객을 대상으로 소득창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신기마을 새터 입구 수호당에서는 정월 15일경을 전후로 마을 제사를 올렸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한편 마을에는 200년 된 용포가 전해진다. 좀이 슬어 지금은 오래된 상자에 잘 보관하고 있다. 상자 안쪽에는 년도 수가 정확하지 않은 소년한국일보 신문이 갈색 시간의 더께를 입고 있다. 용대기와 함께 마을에서 보관하고 있는 오래된 죽절(비녀)도 있다. 누가 사용했는지는 마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황동빛이 도는 죽절은 어느 부잣집 아낙네의 머리를 장식하는 비녀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기마을은 당제를 지내지 않는 대신 마을입구 꽃동산이 마을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 됐다.
 

200여 년 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 용대기는 동치 2년 정나라 목종2년인 1863년에 제작됐다가 광서 18년 1892년에 다시 만들었다고 기록돼있다.
옛날 아낙네가 머리에 꽂는 죽절.

박 이장은 “1993년 처음 이장을 볼 때 이 꽃동산 조경 사업을 하면서 저 느티나무를 희사 받아 심었다”며 “이 팽나무가 우리 어릴 때 놀이터이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팽나무 5본은 수고 14m, 나무 둘레 2.3m로 수령 204년이 된 나무다. 마을 어린이들은 어릴 때 팽나무를 놀이터 삼아 놀았고 배가 고픈 아이들에게 열매를 나눠준 고마운 나무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나이를 먹어가는 자연이 준 선물 같은 존재다.

새터마을 가운데 위치한 회관은 네 번째 지어진 회관으로 첫 회관은 마을 입구 꽃동산에 있다가 지금 자리로 이전했다. 마을 부녀자들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매일같이 모여 밥을 해 먹고 입담을 나눈다. 마을 내 여성 최고령자인 김진순(88)씨는 스무 살에 이동마을에서 시집 왔다. “옛날에는 쌀만 많으면 부자였지. 시집오니 쌀이 이만큼 쌓여 있더란께. 밭농사도 겁나 많고 시집오니 12식구야. 밥 해대느라 힘들었지. 옛날엔 다 부뚜막이잖어. 부뚜막에 상 펴고 밥 12공기 푸고 나면 내 밥은 읎어. 시집오니 시누가 한 살이더라구. 내가 키웠지. 지금은 같이 늙어가. 잘 혀. 우리 신랑허고도 입다툼 한 번 안하고 살았어. 지금 애들 다 잘 되아서 편혀. 맨날 이렇게 회관 나와서 밥 먹고 놀구 허니 좋지.”

오늘도 회관에서는 구수한 멸치 냄새가 진동한다. 수제비 반죽을 하고 멸치를 진하게 우려 호호 불어가며 먹으니 스산했던 몸이 스르르 녹는다. 점심상을 물리고 누구는 의자에, 누구는 바닥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운다. 회관 창밖으로는 누렁개가 한가로이 하품을 하며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끝>

말린 벼를 포대에 담고 있는 강채선 씨. 수원에 사는 막내아들과 함께 했다.
박춘해 씨가 집에 오는 요양보호사와 함께 오늘 점심밥상에 오를 맛있는 겉절이를 하고 있다.
마을유래비석.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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