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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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62>
  • 한지윤
  • 승인 2019.01.30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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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그 후 어땠어요? 댁은 그 후에 진찰 받으러 오지 않았죠. 나는 대개 1주일쯤 뒤에 한 번 더 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말 하지 않았던가요?”
“아뇨. 선생님, 했어요. 그래도 전 가지 않았습니다.”
“왜죠?”
“입덧이 심해서 선생님께 갔거든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기 아빠에게도 그렇게 말할 용기도 없고 해서, 나 혼자 처리할까 해서 선생님께 간 거예요. 그래도 입덧은 낫지 않았어요. 기운도 없었고요.”
“그건 이상한데. 입덧이란 조기의 임신중독증이니까 태반이 없어지면 그 날부터 없어지는 건데……?”
이것도 위암인가 한 박사는 생각했으나 이 여자의 건강한 얼굴로 보아 그런 병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선생님, 전 말예요. 선생님께 시비하려는 것이 아니고요, 그 때 아기가 중절이 안 된 것 같애요.”
“그 후에 다른 병원에 갔었습니까?”
한 박사는 불안스런 얼굴로 물었다.
“네. 지난 달 말쯤 시립병원에 갔더니 역시 임신이라고 해요.”
“그렇습니까……?”
하고 한박사는 거의 신음하듯 입을 다물고 말았다.

“책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째서 다시 오지 않았습니까? 실패했으면 다시 한다는 법도 있을 텐데. 하기야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내 기술이 서툴다고 생각했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저의 어머니가 그랬어요. 억센 분이거든요. 가서 수술비 되돌려 받아내라고요.”
“바쁘지 않으시면 조용한 곳에 가서 자세한 이야기 해 줄 수 없습니까?”
“바쁘지 않아요. 그럼, 저기 커피숍에 가요.”
한 박사는 새로 생긴 사기수법이라도 아닌 가 의심했다. 그러나 다시 조사해보면 과학적인 근거로 쉽게 알 수가 있다. 이 여자의 표정에서는 결코 사기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박사와 만나서 반갑다는 시선이었다.
한 박사는 과거에 이런 수술을 실패한 적이 없었다. 만일 실패한 듯한 불안이 있으면 오히려 기억에 남는 법이다. 1년에 200명 가까이 중절수술을 한다고 줄잡아도 10년이면 2000명은 될 것이다. 그런데도 기억에 없다는 것은 불안이 없다는 것이 된다. 여자는 어두운 그림자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만큼 바다를 향해 ‘소라’ 라는 커피숍 간판이 보였다. 새로 개업한 듯한 말끔하고 아담한 커피숍이었다. 좁은 뒷골목까지도 훤한 한 박사도 처음 보는 커피숍이었다.
“선생님은 커피지요?”
하고, 엽차를 들고 온 레지에게,
“난, 홍차.”
하고 익숙하게 차를 주문했다.
“임신한 뒤로 커피 끊었어요.”
라고 덧붙였다.
“시립병원에서는 뭐라고 진단받았죠?”
“3개월에 접어들었지만 이상은 없고 순조롭다고 하더군요.”
“중절수술 했다는 말 안 했어요?”

“왜요, 말했죠. 어디서 했냐는 건 묻지는 않았고 또 말하지도 않았어요. 나이가 드신 의사선생님이 그 병원에 한 번 더 가서 다시 보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가볼까도 했는데 그 때 시립병원 의사선생님이 한 번 더 중절할 거냐고 묻기에 ‘전 그만 두기로 했어요.’라고 불쑥 대답해 버렸죠.”
“지금 여기서 내가 그 결과를 변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박사는 상대방 여자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시립병원에서 한 말은 잘 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병원에 다시 오지 않았는지가 궁금하군요.”
“죄송해요. 전 이 근방에서 미장원을 하고 있어요. 규모는 작지만 늘 바빠요. 그런데 곧 입덧도 없어지데요. 몸도 좋아지고, 그러는 동안에 아기도 뱃속에서 놀더군요. 이래저래 하루 이틀 미루다보니 늦어지고 말았어요.”
“모레면 안 될까요? 화요일이 미장원 정기휴일 이예요.”
한 박사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슴 속에는 수술을 왜 잘못했나 하는 의문과 함께 언짢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댁의 개인적인 사정을 듣는 것보다는 왜 아기를 그대로 낳기로 했는지가 더 궁금해 지는군요. 대개는 수술이 실패하면 다시 한 번 더 한다는 것이 보통인데.”
“중절수술을 받은 일이 두 번이나 돼요.”
여자가 말했다.

“처음 수술할 적에는 제가 정식으로 약혼한 때였어요. 오랬동안 교제한 남자였어요. 그러다보니 식도 올리기 전에 부부처럼 되고 말았죠. 곧 임신이 됐어요. 결혼식 때가 되니 7개월이 되는 계산이었어요. 저쪽 어머니 되는 분이 보기가 흉할 듯하니 없애 버리라고 하더군요. 저는 낳고 싶었어요. 그이도 나도 젊었고 행복했어요. 그리고 태평이었죠. 아이쯤은 언제라도 다시 임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이의 어머니 말대로 하는 것도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 보기가 좋겠지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말예요. 그래서 중절수술을 해버린 거예요. 그 뒤 2개월 후에 그가 일하던 목재소에서 나무가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쳤죠. 3개월가량 식물인간으로 고생하다가 죽고 말았어요.”
“그런 사고도 생기나요?”
“좀처럼 없대요, 그런 일. 그래서 식도 올리기 전에 어울리지 않게 미망인이 되어 버린 거예요.”
“미용공부 한 건 그 뒤?”
“그래요. 그이의 어머니가 그 아이라도 떼지 않았더라면 하면서 애통해 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요. 제게 큰 몫돈을 주더군요. 새 출발 하라고. 그래서 미용공부를 시작했어요. 알맞은 가게가 하나 나왔다고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개업한 거예요. 춘천에는 그이의 추억이 남아 있어서 싫기도 하고……”<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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