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양청난비 월산 청난사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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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청난비 월산 청난사로 이전
  • 전용식 기자
  • 승인 2007.11.0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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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는 원형복원 돼야 한다

홍성읍에서 예산가도를 따라 금마 은행정 못 미쳐 길가에 금마총이란 한 개의 커다란 무덤같은 것이 있고, 동편에 비각이 있는데, 이 비각이 홍양청난비(洪陽淸亂碑閣) 이다.

최근 장항선 철도공사 관계로 이전이 불가피하게 됨에 따라 군에서는 지난 6월 형상변경허가를 받아 월산 청난사로의 이전이 확정되었고, 이에 따라 지난 27일 해체작업을 하여 현재 보관 중에 있으며 산림법 등 관련법의 허가를 신청해놓고 있는 상황이다.

군 관계자는 “여러 차례 문중 분들과 협의를 거쳐 청난사쪽으로 이전을 결정했다”며 “청난사와 마주보게 세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홍양청난비의 청난사로의 이전을 두고 일각에서는 문화재의 원형복원 측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홍양청난비의 전각을 홍성에서 가져와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 황골에 있는 홍가신의 종택과 묘소, 사당 한편에 홍양청난비 등의 공적비를 세울 것이라는 것이다.

본지 현장취재 결과 아산 만전당 사당에서는 유물전시관 등을 건립하려고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오관리 한모(55세)는 “아산의 문중에서 그러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홍양청난비는 홍성의 문화재이다”며 “어쩔 수 없이 이전을 하게 되었지만 그렇다면 원형복원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양청난비(洪陽淸亂碑閣)
홍양청난비는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壬辰) 4월 왜란으로 왕이 의주파천을 하고 강토는 초토가 되었으며, 꼬리를 이어 닥쳐오는 흉년과 병화로 민심이 극도로 동요된 틈을 타서 선조 30년 병신(丙申) 1596년 7월 초 6일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켜 홍주성으로 쳐들어 왔을 때, 당시 홍주목사이었던 남양인 만전 홍가신이 적을 평정한 사실을 영구히 알리기 위해 1641년(인조 19년)에 비를 세웠다. 오랫동안 방치한 관계로 파손되고 퇴색한 것을 1973년 홍성군수 조영호가 보수하였다.

▲ 홍가신(洪可臣, 1541~1615)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홍도, 호는 만전당, 간옹, 시호는 문장이다. 류성룡의 벗이고 이순신 장군의 사돈인 만전당 홍사신의 문집 ‘만전집’에는 시가 186편, 문이 59편, 제3자들에 의한 평가가 12편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찍부터 유명(儒名)이 있었는데 행실이 청렴결백하다는 것으로 한 세상에 이름이 났다”, “홍가신은 청간(淸簡)하고 욕심이 적으며 직분을 다하려고 힘써 가는 곳마다 모두 치적이 있었다”, “홍가신은 젊어서부터 글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는 등의 인품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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