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 김복한 선생의 애국·독립정신 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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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 김복한 선생의 애국·독립정신 기려
  • 전상진 기자
  • 승인 2010.05.0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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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1860~1924) 선생의 애국․독립정신을 기리는 춘계제향이 지난 28일 서부면 이호리 추양사에서 안동김씨 종친회 및 유림, 지역주민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됐다.

이날 제향은 홍성군수권한대행 이완수 부군수가 초헌관, 홍성보훈지청 한경원 지청장이 아헌관, 충남도의회 이은태 의원이 종헌관을 맡아 제를 올리며 선생의 업적을 기렸다.

지산 김복한 선생은 1860년(철종 1년) 홍성읍 소향리에서 태어났으며 1892년 별시문과에 합격, 홍문관 교리가 됐다. 1894년(갑오년) 4월에 일제가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에 손을 뻗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1895년(을미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11월 단발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이설, 안병찬 등 유생들과 함께 180여명의 의병을 모아 홍주성에 창의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홍주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체포돼 서울로 압송, 10년 유배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이듬해 고종의 특사로 석방됐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설 등과 함께 서울로 상경해 을사5적 처단과 의병을 모집해 일본을 축출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다시 투옥, 뒤에 석방됐다. 이듬해 민종식을 추대, 홍주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떨쳤지만 일제의 공격으로 성을 빼앗기고 체포돼 서울경무청에 수감, 모진 고문을 받았다.

또한 선생은 1910년 국권침탈이후 칩거하다가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전국유림대표 136명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보내 일제의 침략과 조선의 피해를 세계에 폭로했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또다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때 지병을 얻어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도 독립운동과 후학양성에 힘쓰다 1924년 6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고, 선생의 묘소는 1984년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69호로 지정됐다.

한편, 군에서는 김복한 선생 등 유림 137명이 연서한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사건을 기념하고, 이들의 애국·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7년 홍성읍 대교리 대교공원 내에 <파리장서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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