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농심(農心)은 곪아 터지고…늦장마에 농작물 피해를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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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농심(農心)은 곪아 터지고…늦장마에 농작물 피해를 걱정한다
  • 정세인(디트뉴스24 편집위원)
  • 승인 2010.09.0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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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인
지난 주말, 고향인 시골에 갔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모이는 집안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죠. 가는 길부터 날씨가 꾸물꾸물합니다. 빗방울이 간간이 차창을 때립니다. 시골에 도착할 때는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습니다. 밤새 오락가락하던 비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는 장대비로 변했습니다. 입추와 처서도 지나고 초가을로 접어들었건만 장마같은 비가 쏟아 붓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형님은 형수님과 함께 아침부터 고추를 따기로 했는데 날궂이를 해야 할 판이라며 울상입니다. 올해는 8월 들어 궂은 날씨로 인해 고추 농사가 흉작이라고 합니다. 여름철 뙤약볕 밑에서 탄저병 등 각종 질병을 막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수확기에 비까지 내리니 하늘이 원망스럽다는 표정입니다. 지금 따지 않으면 비속에서 곪아 터질 고추밭을 보면서 형님 속도 곪아가는 것 같습니다.

걱정거리는 고추뿐 만 아닙니다. 한창 고개를 내민 벼이삭은 쏟아지는 빗줄기에 힘겹게 버티고 있습니다. 이미 일부 논에는 그동안 내린 비로 인해 벼가 쓰러지려 하고 있습니다. 연일 비가 예보되고 있고 태풍까지 온다고 하니 벼가 엎치는 것은 아닌지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쌀값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풍작을 해야 한다는 농민의 의무감은 수지타산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추석을 앞두고 출하를 서둘러야 하는 과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느 과일이든 수확을 앞두고는 쨍쨍 내리쬐는 한낮 햇볕에 일교차가 커야 착색이 잘되고 맛도 좋기 마련인데, 그렇지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포도의 경우 수분이 많아져 터지고 당도가 낮아지고 있고, 사과나 배도 상품가치가 떨어질 것이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올 추석 때 조상님들께 맛 좋고 색깔도 예쁜 과일들을 올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하늘이 훼방을 부리니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이 김장을 파종해야 하는 시기이지만 계속되는 비가 좋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무우의 경우 씨를 뿌려 싹이 돋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싹이 돋는데 어느 정도의 수분은 필요하지만 요즘처럼 쏟아 붓는 비는 어린 싹을 녹아버려 생장에 지장을 주기 쉽습니다. 배추도 묘를 붓고 옮겨 심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나 비가 온다는 예보가 계속되고 있어 순조로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러다가 올 김장 농사가 잘못돼 자녀들은 물론 외지에 나가 있는 형제들에게 나눠 줄 무우 배추가 부족하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하는 표정입니다.

요즘 날씨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여름(6월 1일~8월 19일) 강수량은 583.3㎜로 평년의 580.2㎜와 비슷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그렇지만 강수 시기가 문제입니다. 통상적으로 장마철로 여겨지는 7월 중순 이전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고 그 이 후 부터는 잦아들기 마련이었는데, 올해는 8월에 비가 집중되고 있습니다. 올해 8월에 내린 강수량은 평년의 170.4% 수준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태풍이 올라오고 있고 북태평양 고기압이 뒷심을 부리면서 9월 중순까지 궂은 날씨가 계속될 것이라는 게 기상청의 예보이고 보면 앞으로가 더 문제입니다.

청명한 하늘은 우리나라 가을의 상징이었습니다. "가을비는 장인 구렛나루 밑에서도 피한다"는 옛 속담도 있습니다. 그만큼 가을비는 내려봐야 양이 적었고 맑은 날이 많았다는 얘기겠지요. 그런데 상황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가을비가 아닌 가을장마로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합니다. 여름 장마철 보다 가을에 비가 잦아지고 강수량도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뿐 만 아니라 국지적으로 집중호우를 쏟아 붓고 있어 가을철 수해도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한반도 기후가 변하고 있는 것은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설명입니다. 지구 온난화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지만 이제 그 변화로 인한 피해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시 주변을 다니면서 봄에 필 개나리가 한 겨울에도 피는 모습을 보고 감상적으로만 느끼던 지구 온난화가 당장 우리 농업에 타격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해가 가면 갈수록 이런 현상들이 더 많이 나타날 텐데 농민들만 걱정할 단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도시에선 채소 값이 올랐다고 아우성입니다. 잦은 비로 인해 농촌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각종 채소들의 출하량이 줄어든 것이 원인이겠지요. 그렇지만 그 이유가 도시민들이 주로 발생시키는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을철 잦은 비로 인한 농촌의 피해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영향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피해는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민을 포함한 온 인류에게 닦칠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대비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생활 속에서 저탄소 녹색운동을 벌여 지구 온난화를 최대한 늦춰 나가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고향 예산에서 다시 대전으로 돌아오려는 데도 빗줄기는 끊이질 않습니다. 당장 빗속을 뚫고 운전할 일만을 걱정합니다. 벌써 가을비 속 농민들의 속 타는 심정은 잊어버리고, 이기적인 도시민들의 속성으로 돌아와 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기적인 모습임에도 자동차 트렁크엔 포도상자가 실려 있고 감자와 김치 등이 한 가득 입니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 여름, 피 땀 흘려 기른 것들을 아낌없이 주고 있습니다.

고향의 따뜻한 정을 다시 한 번 느껴 봅니다. 그럼에도 염치없다는 생각에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요즘 애들 말로 "뻘쭘하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저희 갈게요. 추석 때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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