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교제에서의 자아분화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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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교제에서의 자아분화수준
  • 최명옥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12.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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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의 이성교제는 인간 발달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성교제를 하며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은 감정을 경험하면서, 삶의 환희를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만남이 없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갈등을 경험하면서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기도 한다.

L씨는 20대 여성이다. TV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잠을 자고, 눈을 뜬다. 드라마에 집중하다보면 마음에서 올라오는 불안감이나 걱정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방을 어지럽히는 사람도 없지만 정기적으로 옷이며 그릇들을 꺼내놓고 정리하기를 즐겨한다. 얼마 전까지는 친구들과 전화나 문자를 하고 만나는 것을 즐겨했으나 지금은 연락이 오면 수신거부를 한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친척과도 교류하지 않고 지내지만 외롭다고 느끼지 않는다. 외딴 섬에 사는 것처럼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을 위한 시간을 누리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L씨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엄마는 하늘나라로 이사를 가버렸다. 우연히 엄마 사진을 한 번 본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아빠는 L씨가 6세 때 재혼했다. 새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L씨를 대했지만 엄마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얼마 후 동생들이 태어나자 새엄마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초등학교 때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감정을 나눈 기억은 없다. 그렇게 초등학생 시절을 지나 중학생이 되면서 가출을 자주 했다. 새엄마는 무관심했지만, 아버지의 설득으로 겨우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무의미한 학교생활이 싫어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퇴를 강행했다. 그리고 이글루(igloo, 얼음으로 만든 집)같은 집을 나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가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얼떨결에 아버지와 이별을 했다. 한국이 싫어졌다. 

L씨의 마음을 아는 지인이 외국에 취업하는 경로를 알려줬다. 고민할 것도 없이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이국땅으로 향했다. 언어와 피부색이 달랐지만 열심히 일을 했고,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하지만 고국이 너무 그리웠다. 과감하게 직장을 사직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움으로 사무친 한국에 도착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친구 집에 잠시 기거하면서 방을 구했다. 그리고 과거에 사랑했던 남자친구와 동거를 시작했다. 행복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잦은 갈등과 폭력이 오고갔다. 남자친구가 무서워 친구 집으로 피신을 간 적도 있었고, 불안과 초조함으로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견뎌야 하는 날들이 많았다.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남자친구와 이별을 선택했다. 사랑과 불행을 연결고리로 강력 접착제처럼 붙어있어서 결별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헤어짐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분석가이자 정신과의사인 머레이 보웬(Murray Bowen)은 1950년대 가족치료이론에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 자아분화(differentiation of self)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였다. 개인의 자아분화수준은 사고와 행동, 그리고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쳐서 분화수준이 낮은 사람은 갈등이나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타인과 분리가 어려워 높은 불안을 경험할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분화수준이 높으면 정서적 기능과 지적 기능을 분리해 사용함으로써 의사결정이나 문제해결, 그리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했다. 이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 자아분화수준이 성인이 되어 개인의 가치관과 대인관계, 그리고 부부간에 영향을 미치는데, 자아분화수준이 낮을수록 결혼생활에서 많은 갈등을 경험한 반면, 자아분화수준이 높으면 부부간에 사랑을 가꾸고 유지하려는 노력을 더하게 된다는 것이다.  

L씨는 상담을 통해서 외로워 보이거나 보듬어야 할 것 같은 사람, 그리고 사랑을 갈구하는 남성들에게 더 친밀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동거한 남친은 이혼남으로 아이를 혼자 양육하고 있었고, 그 모습이 어린 시절 아버지와 자신처럼 느껴져 밝은 표정과 따뜻함으로 아이를 대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하지만 보듬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남친이 반복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견딜 수 없었다. 힘든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자신의 자아기능이 너무 허약하다는 것과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지인들과 관계를 단절하는 삶의 패턴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재인식하게 됐다.

사람은 자아분화수준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저마다의 독특한 포인트가 있다. 사람은 자신이 받고 싶었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석처럼 강하게 끌린다. L씨는 어린 시절 자신이 부모에게 받고 싶었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아이를 보고, 그 아이를 돌보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그러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도 사랑을 공급받아야 한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사랑을 주지 못하는 사랑 불능자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알고 주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필요한 것도 알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않아서, 당신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에요, L씨가 새로운 남친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상대가 L씨의 요구를 들어주고 L씨가 상대의 요구를 듣고 서로의 요구를 조율할 수 있다면, 그 만남은 위기를 넘어 새로운 사랑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상대가 나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할 상황이라면, 나와는 자아분화수준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 사람을 떠나보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사는 방법을 익히며 견디다보면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는 날이 있지 않을까.

 

최명옥 <충남스마트쉼센터 소장·상담학 박사·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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