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昌鎭 名唱(김창진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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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鎭 名唱(김창진 명창)
  •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무형유산학과 교수>
  • 승인 2021.11.1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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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量寺裏十年功
艶色針線聲益工
兄弟連枝何不顧   
飜鴉前導引靑空

무량사에 들어가
십년 독공을 하였으니
예쁜 색시가 바느질하듯
소리가 더욱 공교하였네

형제는 이어진 가지이거늘
어찌하여 돌아보지 않았을까
펄펄 나는 갈까마귀 앞장서
푸른 하늘로 이끌었구려

[해설]
김창진 명창은 충청남도 서천 출신이다. 김성옥-김정근-김창룡⋅김창진으로 이어지는 중고제(충청제) 판소리의 적통을 이은 사람이다.

그의 제자 박동진(朴東鎭) 명창의 증언에 따르면, 형 김창룡보다 7∼8살 연하라고 한다. 그렇다면 생년은 1880년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그는 근대 오명창 밑에서 고수로 다년간 활약하다가 부여 무량사에 들어가 십년 독공을 한 뒤 소리를 얻었다. 무량사 산신각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공부를 한 사실은 전설이 되어 내려올 정도다. 

그는 가문의 가풍(歌風)을 이어 중고제 판소리를 했으나 여러 명창들의 특장을 두루 익혔다. 또 장점을 수용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경성으로 올라가 소리판에 뛰어들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명창으로 인정받았다. 세평(世評)에 따르면, 형 김창룡은 중고제이면서도 동편제 소리에 기운 감이 있고, 아우 김창진은 반대로 서편제의 장점을 대폭 수용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김창진에게 배웠던 서천 출신 나성엽 명창이 “김창룡은 산골 사람 장작 패는 식으로 소리를 했고, 김창진은 예쁜 새색시가 바느질하는 것 같이 소리했다”(〈뉴스서천〉)고 증언한 바 있다. 나는 이 증언에 주목한다.

그는 경성에서도 알아주는 명창이었지만, 가문의 법제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사실상 버림을 받았다. 그렇다고 서편제 명창으로 대접을 받을 수도 없었다. 크게 낙심한 그는 아편으로 상한 마음을 달랬다. 

1930년대에는 아예 서천의 판교(板橋)로 내려와 쓸쓸하게 지내면서 박동진 등 몇 사람을 가르쳤다. ‘서은판교인적소(棲隱板橋人跡少)’의 나날이었다. 김창룡은 그가 중고제와 서편제를 섞어서 소리하고, 아편에 중독된 것을 구실로 경성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의 말년은 불행했다. 끝내 아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심청가〉에 장했으며, 특히 〈범피중류〉 대목을 잘 했다고 한다. 느린 진양조 가락은 그를 따를 사람이 드물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 취입한 음반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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