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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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 정세훈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7.21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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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주를 붓는다/아/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기름투성이 체력전을/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오래 못 가도/끝내 못 가도/어쩔 수 없지//탈출할 수만 있다면,/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아 그러나/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이 질긴 목숨을,/가난의 멍에를,/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늘어쳐진 육신에/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주를 붓는다/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분노와 슬픔을 붓는다//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우리들의 사랑/우리들의 분노/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주잔을/돌리며 돌리며 붓는다/노동자의 햇새벽이/솟아오를 때까지

위 시는 박노해 시인이 1984년 9월에 도서출판 풀빛에서 펴낸 그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에 실린 표제 시 ‘노동의 새벽’ 전문이다. 노동자들의 영원한 노동의 새벽! 시집 《노동의 새벽》은 당시 군사독재 정권의 금서 조치에도 100만 부 가까이 발간, 노동자의 목소리가 되었으며 혈기왕성한 대학생들을 노동현장으로 투신하게 했다. 시집에는 표제 시를 비롯해 <지문을 부른다>, <시다의 꿈>, <손 무덤>, <진짜 노동자> 등 가편들이 가득 담겼다. 

고 채광석 시인은 시집 해설에서 ‘그의 시는 이 땅의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이룩하고자 노력한 고통의 산물이다. 여기에는 패배와 일어섬의 연속적인 과정 속에서 이제 참된 노동의 부활, 노동의 해방, 민주주의의 실현, 민족통일의 달성을 향한 부릅뜬 눈동자가 박혀 뚫린 가슴, 잘린 팔다리, 아니 혼백으로라도 기어이 그날에 이르고야 말겠다는 민중해방의 정서 그 자체가 뭉뚱그려져 있다’고 논했다. 

1982년 《시와 경제》 제2집에 <시다의 꿈> 등의 시를 발표하며 한국 시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문단과 우리 사회에 노동해방은 물론, 노동과 민주, 민족통일의 주체가 노동자임을 깊이 각인시킨 시인은 시집 《노동의 새벽》 출간으로 인해 수배 생활을 하게 된다. 

수배 생활 속에서도 얼굴 없는 시인, 노동운동가, 투쟁가 등으로 활동했으며, 시집 《노동의 새벽》 출간 이듬해인 1985년 노동자 정치조직 ‘서울노동운동연합(약칭 서노련)’을 김문수, 심상정 등과 창립,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서노련이 정권의 탄압으로 와해되자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을 백태웅 전(前)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결성했다. 

1991년, 시집 《노동의 새벽》 출간 이후 무려 7년여의 장기간 수배 생활 끝에 안기부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이 구형되었으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당시 시인은 최후진술 말미에서 “내가 사형장에서 사라지더라도 더 많은 박노해가 나타나 노동자,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해주길 바란다”라고 진술, 그를 사랑하는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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