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병과 의병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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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과 의병기념관
  • 한건택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8.25 10:04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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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은 홍성과 인근 지방 유림들의 지도하에 1차 의병인 1895년 을미의병과 2차 의병인 1906년 병오항일의병을 말한다. 제1차 홍주의병은 홍성의 김복한과 이설을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이다. 김복한 중심의 의병 봉기는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된 뒤 더욱 구체화됐다. 김복한의 거병은 12월 1일에 시작돼 수백 명이 홍주성 안으로 들어왔다. 12월 3일, 홍주부 내에 창의소가 설치됐고 김복한은 의병 총수에 추대됐다. 하지만 창의소를 차린 뒤 하루만인 12월 4일 홍주부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김복한과 이설을 비롯해 주모급 23명이 구금, 제1차 홍주의진은 싸워보지 못하고 없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고문을 받은 지산 김복한은 하반신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를 입었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독립운동을 한다.

한편 1906년 초부터 의병봉기를 추진하던 안병찬은 민종식을 찾아가 총수의 책임을 맡아줄 것을 청하고 민종식은 이를 받아들여 의병장으로 의진을 편성하고 1906년 3월 15일(음, 2월 21일) 光水장터(현, 예산군 광시면)로 진군했다. 이들은 이튿날 바로 홍주로 향해 홍주의 동문 밖 夏牛嶺(일명 하고개)에 진을 쳤다가 철수했는데 청양 화성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고 실패한다. 

5월 9일(음, 4월 16일) 민종식은 부여 홍산 지티에서 홍주의병진을 재정비하고 5월 13일(음, 4월 20일)에 홍산 관아와 이어 서천과 비인을 함락하고 5월 18일 5일간이나 전투 끝에 남포성의 함락에 성공한다. 그리고 결성으로 진군해 하루를 지내고 5월 19일(음, 4월 26일) 홍주로 들어갔다. 홍주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의병부대는 홍주성을 포위 공격해 홍주성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5월 20일부터 공주의 고문부 경찰과 수원의 헌병부대가 증파돼 홍주성을 공격했으나 홍주의병의 저항에 실패한다. 이후 몇 차례의 일본경찰과 헌병대의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이등박문은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파견을 명령했다.

홍주의병들은 치열한 시가전을 감행하면서 방어했으나 결국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처참하게 죽어갔고 불과 1시간도 안 된 4시경에 홍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됐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홍주읍성 주변의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홍성에는 홍주의병의 관련된 유적지가 남아있다. 홍주읍성에는 서문인 경의문(景義門), 북문인 망화문(望華門)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없어졌고, 홍주의병들과 일본군이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일본군 사상자들이 발생한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게 됐다. 

홍성 홍주읍성 안 홍주의병공원 한 복판에 병오항일의병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의 자리는 본래 애도비(哀悼碑)가 세워져 있던 자리이다. 애도비는 1906년 병오항일의병 시 의병들에게 죽은 일본군과 그들의 앞잡이가 됐던 매국노들을 애도하기 위해 매국노의 일원인 중추원의장 김윤식이 글을 짓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글을 쓴 비(碑)로 일제강점기 동안 민족적 분노의 대상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홍성군민은 이 비를 철거하고 홍주의병의 영웅적 항쟁을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해 병오항일의병기념비를 세웠다.

홍주의사총은 병오항일의병 당시 전사한 수백명의 의병군 유골이 임시매장됐다가 해방 이후 분묘를 조성해 구백의총(九百義塚)이라 했다가 홍주의사총으로 바뀌었고 매년 6월 1일 의병의날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 묘역 옆에는 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丙午殉難義兵將士公墓碑)가 있는데 정인보(鄭寅普)가 찬하고 심상직(沈相直)이 글씨를 썼다.

홍주향교는 의병대장 김복한이 홍주향교 도유사로 을미홍주의병을 이끌었다. 홍주의병 중 서승태도 홍주향교 도유사 출신이고 다수의 홍주의병들이 홍주향교 출신이고 홍주향교는 항일의병의 진원지이다. 

홍주의병은 민족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충청도 서부지역에서 일어나 의병전쟁이며 그 중심에는 홍주와 홍주읍성이 있다. 그러므로 의병기념관은 홍주읍성 안 혹은 홍주읍성 주변에 위치해야 관련 유적지들과 상호 연계가 되고 의병기념관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홍주의병이 차지하는 위상이 크게 평가되기에는 의병기념관은 홍주읍성 주변에 세워지는 것이 타당하다.

한건택 <내포문화관광진흥원 원장·독자·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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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2023-01-08 21:32:33
오지도 가지도 않는 기념관
그만 좀 만들어라!
나랏돈이 내 돈 아니라고
건설사 배블리는 행위 그만 했으면 한다.

000 2022-08-27 10:16:26
'홍성'이 '홍주'.... 이는 또 다른 역사왜곡이다. 과연 홍성군이 과거 충남서북부 지역의 문화와 사상을 계승은 하고 있나? 그저 홍주읍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논리가 빈곤하고 박약하다.

ㅇㅇ 2022-08-25 18:56:21
내포문화관광진흥원??? 문화와 관광을 생각하면 이따위 칼럼 쓰면 안되지 ㅉㅉ 홍성신문 홍주신문이 이런 개짓거리할때마다 내포시민들은 홍성에 정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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