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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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장
  • 윤주선 임업후계자
  • 승인 2013.04.19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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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이 며칠 지나지 않아 차례를 지내고 남은 과일과 곶감, 과즐, 다식 등 먹을 것들이 벽장에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십 여리 되는 거리를 여느 때보다 두 배 이상 빠른 속도로 집을 향해 내달렸다.
청광리 고갯마루 성황댕이를 지나 다리실 고갯길을 내려올 때는 가로로 질끈 동여맨 책보 속의 연필통 소리는 보폭 크기에 맞춰 웬 소리가 그렇게도 크게 나던지…….
집이 가까워올수록 혹시 할머니께서 집에 계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소 불안했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집에 도착해 집안을 살펴보니 다행히 아무도 안 계셨다.
좌우를 살핀 후 키가 작아 벽장문에 닿지 않아 마루구석에 놓여 있던 말을 대충 엎어놓고 올라가 문을 여는 순간 찬 공기와 과일 냄새, 약간의 비릿한 생선냄새가 진동을 하고 잠시 후 깜깜하던 벽장 안은 차츰 밝아져가며 사과, 오징어, 밤, 다식 등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온몸이 흥분이 되어 무엇을 먼저 고를지 망설이는 동안 어느 새 곶감 두 개, 다식 세 개, 과즐 등은 호주머니에 넣고, 오징어 다리는 표시 나지 않게 두 개만 찢어 하나는 입에 물고 흥분 반, 두려움 반으로 벽장문을 닫았다. 벽장문을 닫는 순간에도 향긋한 사과 냄새가 흠뻑 밀려 나왔다.
딛고 올라섰던 말은 제자리에 갖다 두는 등 마는 등……. 정신없이 내려와 옷을 턴 후에 학교에서 갓 돌아온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꼭꼭 숨어 있을 때마다 밤이며 다식 등을 나누어 먹었다. 실컷 놀다 해가 질 즈음 집으로 돌아와 살그머니 집안을 살펴보니 할머니께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생솔가지 연기에 고운 인상을 쓰시며 아궁이에 불을 떼고 계셨다.
방에 들어가 숙제나 하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날따라 끝까지 할머니 옆에서 불 때는 일을 도와 드렸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집에서 가장 큰 보물창고였던 벽장은 적어도 열 번은 더 덧대어 발랐을 법한 울퉁불퉁 계곡 진 벽지로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다. 벽장문을 열면 한꺼번에 밀려 나올 것 같은 진한 사과 향기와 알면서도 모른 척 눈감아 주신 우리 할머니, 이 모두가 나에게는 아련한 추억이 되어 다시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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