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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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을 꿈꾸다
  • 이예이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5.04.10 09:20
  • 호수 885호 (2025년 04월 10일)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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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이예이</strong><br>홍성녹색당<br>칼럼·독자위원
이예이
홍성녹색당
칼럼·독자위원

12.3 계엄 이후 신문에서 ‘확증편향’이란 단어를 자주 본다.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 찾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 해당 기사는 계엄 그리고 새로운 극우세력 등장의 배경 중 하나로 ‘알고리즘’을 꼽았다.

나의 경우 선곡을 인공지능에 맡기며 알고리즘 세계에 발을 들였다. 

학창 시절엔 언니 음반을 빌려 듣다가, 스무 살 지나고부터 내 소유의 음반을 모았다. 음악을 듣는 일은 품이 드는 활동이었다. 정보를 구하는 것도 그랬고, 음반 가게까지 원정을 떠나야 하는 것도 그랬다. 음반이 음원으로 온라인에 업로드되기 전까지, ‘음악 청취’는 복잡한 행위였다. 의외로 ‘미리 듣기’는 선택 사항이었다. 듣지도 않고 음반을 구매하다니, 스트리밍이 보편화된 요즘 시각에선 어리석어 보일지 모른다. 아마 좋아질 거라 믿었던 것 같다. 몇 장 없는 앨범을 듣고 또 들으면 하나같이 소중해졌고 결국은 좋아하게 됐다. 

온라인에 접속해 음원을 헤매기 시작하며, 음악은 전과 다른 의미로 변해갔다. 외양은 단순해진 듯했지만, ‘취향’이란 새로운 과제가 던져진 것이다. 몇 해 전 등장한 음악 추천 알고리즘은 선곡의 수고를 덜어줬다. 무한에 가까운 음원 사이에서 무서울 만큼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냈다. 한 번은 오래전 좋아했다가 잊고 있던 타국의 인디 밴드 음악이 뜨기도 했다. 신통방통했다. 문제는 있었다. 재생 목록은 길게 이어졌지만, 내가 쳐둔 가상의 울타리를 넘진 못했다. 장르의 다채로움을 어플에게 이해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일이었다. 정보를 설정(좋아요)하지 않은 세계는 홈 화면에서 자취를 감췄다. 
 

《북극을 꿈꾸다》 배리 로페즈/ 북하우스/ 2024년 3월/ 23,000원

베리 로페즈의 《북극을 꿈꾸다》는 기울어진 앎에 관한 이야기다. 북극은 북반구 온대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대륙이다. 해가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서 뜬다. 그것도 아침이 아니라 봄에 떠올라, 저녁 아닌 가을에 진다. ‘하루’라고 생각하는 시간 단위는 계절적 현상이 된다. 태양은 둥글지 않고 직선이거나 사각형이기도 하고 (노바야젬랴 현상), 달은 여섯 개로 떠오르기도 한다 (무리 현상).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잠언의 형식으로 받아들인 어떤 ‘이치’들이 단지 내가 속한 대지에 국한된 것이라는 산뜻한 충격이 따른다. 

북극의 리처드슨 버드나무는 200년을 살아도 줄기가 손가락 마디 굵기에 그친다. 이 나이든 작은 나무들은 관습적인 ‘살아있음’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기묘한 생들이 책 전반에 이어진다. 사향소, 북극곰, 일각고래, 에스키모 그리고 빙산 같은 온대에 속하지 않는 이들의 생활사를 통해 저자는 관습적 지식에서 벗어난 세계가 있음을 일깨운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북극 크루즈 여행 상품이 출시됐다는 기사를 봤다. 이런 종류의 ‘북극에 대한 꿈’은 책의 제목 ‘북극을 꿈꾸다’를 가장 심각하게 오독한 경우다. 저자가 북극의 독특한 생태를 묘사하는 이유는 탐험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북반구 온대’가 상징하고 있는 관념적 지식 체계를 성찰하기 위해서다. ‘온대-서구’의 이해 방식을 벗어나 세계의 복잡성을 인정할 수 있는 “현실주의자”가 되길 촉구한다. 저자는 각자가 속한 대지 즉, 앎과 이해의 토대에 씌워진 관념을 거두는 상징적 도구로써 북극이 차용되길 바란다. 문자 그대로의 ‘북극’이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북극’을 꿈꾸길 바란다. 

“북극 생명의 고유한 리듬, 또는 리듬들을 식별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학문적인 차원을 뛰어넘는다. 한 지역이 왜 다른 지역과 다른가를 이해하고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그 신비를 설명하는 일은 (…) 일종의 편견으로부터 해당 지역을 지키는 일이다.” 
대통령의 알고리즘이 그랬듯 확증편향은 민주주의의 위협이다. 생각과 신념에 대한 광적인 확신이 사회에 얼마나 끔찍한 해악인지 목도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 폐쇄적인 울타리의 확장이 아니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겸허하고 수용적인 태도 아닐까. ‘모른다’는 상태야말로, 이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현실 인식’이다. 
음반이라는 한정된 자원 내에서만 음악을 듣던 시절, 새로 산 음반을 기기에 넣고, 대체 무엇이 흘러나올지 충격을 기대하는 그때가 음악을 듣는 과정 중 가장 설레는 순간이기도 했다. ‘모른다’는 것은 알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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