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녹색당
칼럼·독자위원
엄마는 고향이자 시가이기도 했던 이 지역 주변에 오면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고 한다. 좀처럼 정리된 이야기로 설명해 주지 않아서 짐작만 할 뿐이지만, 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인 것도 같고, 어린 시절 그리고 시집살이를 사는 동안 쌓인 서러움이 올라오는 듯도 하다. 뜨문뜨문 들려준 단편 속 엄마와 이모의 어린 시절은 오빠들과 달리 ‘학교’라는 탈출구도 없이 고된 노동을 감당한 시간이었다. 시집가서도 비슷한 강도의 노동에 더해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된 출산, 어린 시동생들까지 돌봐야했으니 세월이 흘러도 뭔가 올라오겠구나 싶다.
《억척의 기원》은 나주 여성 농민 김순애와 정금순의 구술생애사다. 둘의 생애 위에 자연스럽게 엄마와 이모의 삶이, 할머니와 언니들의 삶이 겹친다. 엄한 아버지,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노동, 돌봐야 하는 가족들, 그래서 포기된 학업, 일찍 뛰어들어야 했던 생업,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심지어 폭력에서 시작된 결혼, 고된 시집살이, 나쁜 인간이어도 자식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는 남편, 감당하고 감당해 내는 이 억척의 역사 앞에 일단은 그렇지 못한 온실 속 화초 같은 자신이 부끄럽고 그다음은 자발적이기도, 강요된 것이기도 했던 그들의 인내심에 분이 터지기도, 눈물이 나기도 한다.

애잔함을 넘어 경외감이 든다. 폭력적이었던 ‘아버지를 미워한 힘’을 동력으로 개척한 김순애의 삶처럼, 이들 억척의 기원이 비록 아픔과 상처였을지라도, 주저앉지 않고 자신을 일으켜 삶을 완성해 나가는 힘, 그 열정 앞에 숙연해진다.
그러나 이 초인적인 힘을 위대하다 칭송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이를 국가주의라는 시각에서 분석한다. 한국은 국방비 지출이 높은 나라다. OECD 국가 내에선 미국 다음으로 높고, 전 세계로 확대해도 9위를 찍는다. 한국의 지정학적 요인을 들며 그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의아한 일이다. 안보 논리를 떠나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정희진은 낮은 복지 지출 비율에 주목한다. OECD 회원국 중 한국의 복지 지출 비율은 10%대 초반으로 하위 5위권이다. 높은 국방비 지출을 충당하느라 복지의 영역은 분단 이래 항상 부족했고, 그 빈 구멍은 지금껏 여성들의 돌봄과 값싼 노동에 의지해 간신히 채워져 왔다.
공동체가 함께 책임져야 할 ‘돌봄’의 영역을 개인에게 떠넘기기 위해서는 ‘여성’이라는 역할 수행이 필요하다. ‘여성’을 사는 개인의 내면은 어떨까. 엄마, 딸, 시어머니, 며느리, 아내의 역할이자 도리라 불리는 것들을 수행하는 개인은 분노를 삭이고 내게 상처 주는 폭력적인 정황 앞에 무뎌지기를 기꺼이 선택한다. 이 책은 편집된 서사가 아닌 ‘구술’이라는 방식으로 여성이라는 복잡한 역할이 내면에 어떤 모순적인 감정들을 촉발해 내는지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인터뷰어 최현숙은 화자의 분노, 체념, 때로 보람이나 환희 등을 조용히 따라가지만, 때마다 적절한 질문들을 던져 ‘도리’ 안에 가려져 차마 직면하지 못했던 화자의 감정을 꺼내도록 돕는다.
최현숙은 후기에서 ‘이 타산이 없는 일방적 돌봄’과 ‘신자유주의(국가주의)와 가부장제’의 관계가 서로를 어떻게 강화하는지 후술하고 있다. 저자는 ‘여성주의적’ 잣대를 가지고 이들의 삶을 평가하기 위함이 아님은 분명히 밝힌다. 다만 농촌도 농촌 여성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현실 앞에, ‘가족’이라는 혈족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던 과거의 ‘억척’이, ‘무시당한 자들의 깨달음과 연대’로, ‘서로를 키우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힘’으로 변모하길 바란다고 덧붙인다.
내가 사는 홍동면 구정리 일대는 아빠의 먼 친척뻘들이 사는 곳이다. 엄마는 막 시집와서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시아버지 뒤를 따라 예산 광시에서 이곳까지 걸어왔다. 옷도 불편하고 길도 험했지만, 시아버지는 기분이 좋았고, 힘든 내색은 할 수 없었다. 그 길을 걸으면 아직 20대인 엄마와 나란히 걷는 듯한 착각이 인다. 엄마 앞에 펼쳐진 다른 길 역시 억척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 애잔해진다. 지금은 산속 깊은 구석까지 도로가 잘 닦여 힘들이지 않고도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내 옆엔 시아버지가 아닌 개가 걷고 있다. 농촌도 변했고, 그곳의 여성도 변했다. 나 역시 저자가 지칭한 ‘앞으로의 농촌 여성’, 나를 먹여 살린 이들의 억척을 떠올리면 부채감이 든다. 그들에게 빚진 삶, ‘새로운 억척’을 낼 용기가 필요하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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