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불사 주지
칼럼·독자위원
말과 글을 잃어버리면 역사와 문화도 함께 사라진다. 말과 글로 소통한다는 것은 공동체가 기정사실로 확정지었음을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불행하게도 오랫동안 우리 민족으로부터 시작된 문자를 한문(漢文)이라 부르며 아예 중국문자라고 치부해 버렸다. 이와 동시에 찬란했던 고대사와 고대문화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최근 들어 우리 민족이 활동했던 북방에서 나타나는 요하문명 지역에서 한족의 황화문명보다 이른 시기의 유적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기존의 근거에 이를 보태어 한자는 한나라가 정리한 문자일 뿐, 그 근원과 바탕은 우리 조상인 동이족으로부터 시작됐음이 분명한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그래서 백번을 양보해 한자는 동이족을 필두로 대륙에 살았던 수많은 민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널리 알려진 단군신화에는 하늘을 다스리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 그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길 간청했고,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이것을 먹으며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곰은 100일을 견뎌 사람이 됐다고 한다. 단군신화를 근거로 곰 웅(熊) 자를 살펴보면, 한자는 우리 민족이 만들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금문에는 곰(熊)이 <能>자로 표기 되고 《좌전(左傳)》 역시 “今夢黃‘能’入於寢門-방금 꿈에 누런 곰이 침실 문으로 들어왔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곰이 사람으로 변하는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사용하고 있던 ‘곰 웅[能]’자는 ‘가능한 일’ 또는 ‘참고 견딤’이라는 뜻의 <견딜 내(能) 또는 능할 능(能)>자로 자리를 내어주었다. 곰이 100일을 능히 견뎌 사람이 되었다는 단군신화가 아니면 <能>이라는 글자가 ‘견디다’ ‘능하다’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특별한 이유가 없어 보인다. 더욱 확실한 근거로 ‘파할 파(罷)’자가 있다. 파(罷)자는 <能+罒>로 이뤄졌다. 다시 말하면 <곰能>이 <싸고 있던 껍질罒>을 벗고 나왔음을 형상화 한 것이다. 이때 파(罷)는 혁파(革罷)로서 안쪽 가죽[革]을 찢고 나왔음을 말한다. 즉, 겉가죽 [피(皮)]만 변한 것이 아니라 내면까지 완전히 깨뜨려서 달라졌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모양 태(態)’자 있다. 즉 곰[能]이 겉모습은 물론 마음(心)까지 전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기존글자의 의미가 바뀔만한 ‘특별한 곰’과 ‘특별한 사건’은 단군신화이다. 아무리 대단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 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영향력이 없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따라서 기존의 글자 <能>을 다른 의미로 내어주고 <能+灬(불화)>을 더해 새롭게 ‘곰 웅(熊)’자가 탄생됐다는 것은 단군신화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엄청난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우리 민족의 영향력이 막강했음의 방증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能+灬=熊>의 곰은 어떤 곰일까? 여기에 대해 혹자는 ‘불 화(灬)’를 ‘붉다’로 읽어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은 불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 화(灬)’를 ‘음식을 조리하다’로 이해하면 곰에게 음식을 올리는 것으로 제사나 축제에서 받들어지는 신령스러운 곰이 된다.
현재 백제 수도였던 공주 ‘고마나루’에 희미한 흔적이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 문화나 풍습에서 곰(熊)을 주제로 하는 것들을 찾기 어렵다. 이것은 한나라 이후 글자의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생겨난 일이라고 본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서 한자라는 용어 대신 고문자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고문자를 잃어버림으로써 다음과 같은 잘못된 상식이 자리 잡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의 문화 역량을 강조하며 “책(제목)을 잊어버렸는데 그 옛날 수천 년 전 중국 역사서에 나오죠, 동이족에 대한 이야기인데 가무를 즐기고 큰 활을 잘 쏘는 저 동쪽에 오랑캐가 있는데 거기는 잘 건들면 안 된다. 뭐 위험하다.”고 했다. 동이족(東夷族)의 ‘夷’자를 오랑캐로 읽은 것이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그렇게 배워왔으니 꼬집어 탓할 수는 없는 아픔이다.
고문자를 해설한 《설문해자》에서는 동이(東夷)를 동방지인(東方之人-동쪽의 사람)이라 했고, 청대의 단옥재는 《설문해자주》에서 “동이는 대인의 뜻이고, 동이의 풍속이 어질고, 어진 사람은 장수하기 때문에 군자가 끊어지지 않는 나라(惟東夷徒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라고 적었다. 그리고 《설문통훈정성》에서는 이(夷)는 ‘인(仁)과 같고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라고 소개한다.
이를 근거로 중국의 자전에는 이(夷)에 대해 “東方之人也 夷俗仁壽 有君子不死之國-夷는 동쪽 땅에 사는 사람들로서 그들의 습속이 어질어 장수하며 군자들이 끊이지 않는 나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 덧붙였다. 즉 활을 잘 쏜다고 밝혀놓은 것은 군사력이 뛰어남으로 함부로 침략해서는 안 됨을 경고하는 것이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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