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2>
소리꾼 장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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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사익
  • 장윤수·김현선 기자
  • 승인 2015.04.2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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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사익

“현실에 집착하는 끈을 놓으니 꿈이 잡히더라”

▲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된 장사익 씨.


우리시대 최고의 가객, 소리꾼 장사익 데뷔 20년
충청도 토종사투리 올곧은 구수한 토종홍성사람
장사익 글씨체 ‘흘림체’ 디자인화 세계에서 주목


장사익(1949~)은 충남 홍성 출신의 가수이자 국악인이다. 선린상고와 명지대를 졸업하고, 그의 나이 마흔여섯 되던 1995년 1집 ‘하늘가는 길’을 발매하며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국악평론가들 사이에서 ‘가장 한국적으로 노래하는 소리꾼’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대표곡은 ‘찔레꽃’이다. 홍성 출신으로 대표적인 가객(歌客)으로 꼽는 장사익. 광천 삼봉이 고향인 이 시대의 진정한 소리꾼, 음악은 어디에도 얽매지 않고 자유스러워야 한다고 수줍은 듯 단호히 말하는 사람, 시를 수백 번이고 읊조려 내 시로 만들고야 만다는 사람, 마흔 여섯 나이에 평생 해보고 싶었던 일을 시작해 성공한 사람, 노래는 팔자고 운명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소리꾼 장사익. 그의 이름과 함께 구성진 음률은 이렇게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북악과 인왕을 바라보며 고단했고 못마땅했던 지난 세월의 삶의 판을 필름으로 되돌리듯 희끗한 머리의 촌사람, 예순일곱 해 그의 생애에는 우리네의 고된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구슬프게 울리던 ‘찔레꽃’이 어느새 장중하고 무겁게 내리치는 듯 더불어 사는 이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을 안고 무게를 풀어주는 장사익의 노래는 ‘사람이 그리워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고 있다. 마흔여섯 나이에 느지막이 시작됐지만 그의 변신은 결코 늦깍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풍김과 저력이 있다. 수더분한 충청도 사투리에 변함없는 겸손이 더욱 정겨운 사람으로 우리네 가슴으로 깊숙이 다가온다. ‘현실에 집착하는 끈을 놓으니 꿈이 잡히더라’는 장사익의 말처럼 척박한 현실에서 꿈을 이룬 그의 삶이며 신명이다.

이제 데뷔한지 20년을 넘기는 세월을 보냈다. 한번 마음먹고 3년만 죽도록 해보자고 마음먹은 장사익은 1993년부터 김덕수패를 따라다니며 태평소를 불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웅변을 했다고 한다. 워낙 음치여서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된 일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에 올라가 마음껏 목청을 높였다. 그때 ‘소리’가 터졌다고 한다. 오서산의 기를 받아서 일까. 그의 내공이 터진 것은 1993년의 일이다.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공주농악 태평소로 장원을 차지하면서 드디어 ‘등극’을 한 것이다. 같은 해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는 ‘결성농요’로 ‘대통령상’을 탔다. 그에게 1993년은 국악연주자로서의 자리를 확인해 주었고 ‘시’에 눈을 뜨게 해준 의미 있는 해로 기억된다. 1994년에는 자신을 확인하는 계기를 갖는다. 또다시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금산농악 태평소로 장원을 차지하면서 ‘장사익’을 재확인한다. 결국 태평소가 장사익의 노래 길을 열어 준 셈이 됐다. 그해 11월에는 서울 신촌에서 ‘소리꾼’으로서 첫 공연을 갖게 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흥얼거림의 미학은 계속되고 있다.

 

▲ 홍주신문에 보내온 장사익 씨의 친필 축전.

1994년 장사익 소리판 ‘하늘가는 길’로 ‘가수’라는 걸 데뷔했다. 기침(1998), 허허바다(2000), 꿈꾸는 세상(2003) 등의 음반을 냈고, 1996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장사익 소리판 하늘가는 길’ 공연이후 60여 차례의 공연이 국내외에서 있었다. 1995년 ‘뜬쇠사물놀이’로 KBS국악대상, 1996년 ‘뿌리패사물놀이’로 연거푸 KBS국악대상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국회 대중문화 미디어대상 국악상 수상, 2007년에는 한국관광홍보대사로 위촉됐으며,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장사익과 국악은 ‘인연’이 깊다고 한다. 그는 1949년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에서 태어났다. 이미 그에겐 농악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광천장날 장터에서 울려 퍼지던 흥거움의 가락소리는 성장과정에서도 그에게 큰 영향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부친은 소문난 장구잽이였다고 한다. 부친의 가락을 듣고 자라던 장사익에게 우리가 ‘쇄납’이라고 부르는 ‘태평소’의 소리는 그의 귀를 뻥 뚫리게 하고도 남았다. 그래서 시작된 ‘태평소’와의 인연이 오늘의 장사익을 있게 한 원인이다.

그는 별의별 일을 다 해보았다고 한다. 광천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장사익은 선린상고 졸업 후 열대여섯 가지의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면서도 ‘노래에 대한 꿈’의 끈을 놓지 않은 것도 장사익의 ‘집념’이고 ‘의지’였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피리도 불고, 태평소도 잊지 않았다.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 라이브공연에서 태평소 연주를 맡은 것도 장사익이었다. 장사익은 국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오면서 1997년 SBS드라마 ‘임꺽정’ OST,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2집 타이틀곡 ‘하여가’에 태평소 파트를 연주해 유명해졌다. 국악을 바탕으로 무르익은 그의 노래는 독특한 창법을 이루면서 소리꾼 ‘장사익 창법’의 장르를 형성하고 있다. 결국은 장사익의 지독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래서 그가 판을 벌이면 언제나 관객은 자리를 꽉 메운다.

가축장사를 하던 평범한 농부의 7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의 모습도 전형적인 농부다. 농부는 일등을 하려고 아득바득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흙의 진리를 아는 질그릇 같은 맛을 지닌 가수가 바로 장사익 이다. 그는 마흔이 넘어 내린 자신의 결단에 대해, 아무것도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그는 독학으로 1년 동안 단소를 배우고, 5년 동안 피리를 익혔으며 1986년부터 태평소를 불었다. 그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장사익의 내공이었음에랴. 이러한 내공의 한편에서는 그가 관객과의 호흡을 맞추는 구성진 노래의 음률만큼이나 부드럽고 참으로 독특한 장사익의 글씨체인 ‘장사익 흘림체’가 새삼 재조명되면서 서단에 조용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난 2006년에는 이상봉 디자이너의 파리컬렉션에 장사익의 흘림체가 디자인으로 승화돼 전 세계에 알려진 바 있다. 또 2011년 세계서예전북비엔날에서 장사익 글씨체인 ‘흘림체’가 실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장사익은 “나는 원래 글씨를 못 썼다”면서 “무슨 일이든 10년이면 자기 색이 나오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는 지난 3월 19일 서울 창성동 본사에서 문화예술 부문 친선대사로 장사익을 임명했다. 임명식에는 유니세프캐나다위원회 스티브바라캇 친선대사, 고(故) 앙드레김 친선대사의 아들 김중도 앙드레김아뜰리에 대표가 함께 참석했다. 장사익은 지난 2007년 5월부터 약 9년 간 유니세프 특별대표로 활동하며 어린이를 돕는 유니세프를 지원했다. 2006년 12월 유니세프 기금 마련을 위한 소리판을 시작으로 2007년 미주순회공연을 통해 기금을 전달하는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친선대사로 임명됐다.

장사익 친선대사는 “특별대표에 이어 친선대사로 임명되어 무척 기쁘고 뜻 깊다”고 말하고 “앞으로 현지 시찰 방문, 자선행사 참석, 공익광고 출연 등의 활동으로 전 세계 어린이를 도울 예정”이라고 밝히고 “전 세계 어린이에게 날개를 달아주어 높고 푸른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유니세프는 명망 있고 평판 높은 문화예술인이나 스포츠 계 인사 등을 대상으로 유니세프의 어린이 지원사업에 참여하도록 친선대사를 선정한다. 현재 유니세프한국위원회의 친선대사는 장사익을 포함해 영화배우 안성기, 소설가 신경숙 등이며 지휘자 정명훈과 김연아 선수는 국제 친선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지난 3월 2일 방송된 KBS1 창립 42주년 ‘공사창립 특집 콘서트 이미자 장사익’에서는 장사익과 이미자가 함께 무대를 꾸며 모두를 감동시켰다. 특히 장사익은 ‘봄비’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뿐만 아니라 대표곡 ‘찔레꽃’과 ‘꽃구경’ 그리고 ‘허허바다’ 등을 밴드 연주와 함께 부르며 무대를 장악했다. 이날 가수 이미자는 장사익과 함께 했던 지난 세월들을 떠올리며 “정말 성의 있게 노래하는 분”이라면서 “우리 전통가요를 어쩜 그렇게 한 맺힌 소리로 표현하는지 후배지만 기특하다”고 말했다. 장사익은 1949년 생으로 올해 67세며 이미자는 1941년 생으로 올해 73세다. 6살 차이가 나는 이미자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장사익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아름다운 목소리로 내일 모레 팔순이 다 되셨는데 소리가 흐트러지지 않고 목소리도 갈라지지도 않는다”며 가슴에서 우러나는 존경심을 내비쳤다.

북한산 자락의 한 마리 새,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이든 3년만 해봐라.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국민 소리꾼’ 장사익. ‘빼고 또 채운다’는 장사익의 철학처럼 온몸으로 부르는 그의 ‘사람이 그리워서’ 찾는 목청의 울림은 올 한해 ‘민초’들의 위안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1965년부터 서울에서 생활했지만 아직도 서울말보다는 충청도 사투리가 올곧은 구수한 ‘홍성사람’이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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