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개벽한 이래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논란 몇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는 이유는 엄마와 아빠 중 누구의 머리를 닮아서인가’이다. 가끔씩 아내와 나도 이 문제로 티격태격하곤 한다. 학창시절 꾸준히 좋은 성적을 유지한 아내는 나를 비난했고, 다소 늦게 정신 차린 만큼 폭발적으로 공부한 나는 아내의 머리를 의심했다. 우리도 이 문제에 대해 논쟁 할 때마다 결론 없이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쨌든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의 학교 성적이 시원찮은 것만은 부인 할 수 없다.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는다. 어차피 공부는 본인이 하는 것이고, 강요해서 될 일도 아니고, 또한 공부를 못하면 다른 재주라도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다. 내 생각이 이러하니 아이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난 시험 성적표를 가지고 와도 항상 웃으며 “고생했네. 시험 점수가 어떻든 무조건 사랑해”한다. 덕분에 아이들은 또래보다 밝고 순하게 자랐고, 나는 여느 집과는 다르게 학교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쿨한 아빠로 인식되는 부수입도 얻는다.
얼마 전에는 아홉 살짜리 딸아이가 아내와 국어 받아쓰기를 몇 시간씩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20점을 받아왔다. 그날 밤 아내는 심한 두통으로 일찌감치 자리에 드러누웠다. 심지어 최근 수십 년간 들어보지도 못했던 방과 후 ‘나머지 공부’ 프로그램에 들어오라는 담임선생님의 은근한 제안을 받아 아내를 더욱 근심투성이로 만든 딸아이는, 나머지 공부 첫날에 집에 와서는 천진난만하게 “엄마, 나머지 공부 되게 재밌어. 나 맨날 하고 싶어”해서 기어코 아내를 실성한 사람마냥 피식피식 웃게 만들기도 했다.
작년에 갓 중학생이 된 큰 애가 학교에서 중간고사를 보았다. 시험 하루 전날 꼼짝 않고 공부하는 모습이 대견해 과일을 들고 아들 방에 들어갔다. “우리 아들, 열심히 하네” 아들은 묵묵부답이다. “내일 영어 시험 몇 점이 목표야”했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100점이요” 한다. 어떤 문제가 나올지 궁금해 교과서 시험범위를 들춰봤더니 지나치게 깨끗하다. 당장 내일이 시험인데 교과서가 새 책처럼 깨끗한 이유는 이제 처음 공부하기 때문이란다. 갑자기 ‘아차’싶었다. 나는 조용히 “아들. 미안하지만 너는 시험에서 100점 맞으면 안 돼.” 아들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너를 무척 아끼지만, 100점은 너보다 훨씬 더 노력한 친구들이 받아야 하는 거야. 너는 내일 있을 시험을 이제 처음 준비하니 잘 해야 50점정도 맞을 것이고, 그것이 너에게 어울리는 점수야. 더 좋은 점수를 갖고 싶다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해” 며칠 후 아들은 60점의 점수를 받아왔고 나는 다시금 쿨한 아빠로 돌아가 “수고했어. 그리고 무지 사랑해”했다.
골프가 참 재밌다. 탁구공만한 작은 놈을 잔디에 놓고 골프채로 힘껏 내리쳐 시원스럽게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일상에서 축적된 갖은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야구 방망이처럼 채를 뒤로 빼서 냅다 휘두르는 이 원시적인 행위가 여전히 재미있는 이유는 흔들리는 몸과 마음을 최대한 집중시키고 정확한 타이밍으로 타격 할 때 느껴지는 ‘손맛’ 때문이다.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스윙에서 느껴지는 그 ‘손맛’을 한 번이라도 맛보았다면 골프의 매력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 ‘손맛’을 매번 느끼기 위해 부담스런 비용을 지불해 레슨을 받고, 시간을 투자하여 수 백 번의 동영상을 보고, 수 천 리터의 땀을 연습장에서 쏟는다. 반대로 골프에 다소 시들해진 요즘에는 예전만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니 부끄러운 스코어를 감내해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골프와 같지 않을까. 무엇인가 간절하게 얻고 싶다면 그에 맞는 노력과 시간이 요구된다. 좋은 성적을 위해서는 몇 번씩 반복하는 준비가 필요하고,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솔직함과 배려심이 필요하고, 진실한 신앙을 위해서는 고난의 순례가 필요하다.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여러 개의 유혹과 난관을 만나는 것은 거의 필연인데, 이 모든 어려움을 인내하고 앞으로 정진하는 것도 각자의 결정이고, 달콤한 결과를 맛보는 것 또한 오롯이 본인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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