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 얼
상태바
홍주의 얼
  • 이현조 <문화in장꾼·시인·주민기자>
  • 승인 2016.06.30 14: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주. 최근 자주 거론되고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홍주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단순히 홍성의 옛 지명이라서 관심을 갖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석기시대로부터  운주로 불렸던 시대, 그리고 홍주로 바뀌며 존재했던 시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이후 일제강점기 홍성으로 지속돼 온 지금까지의 역사와 문화로 생각해 볼 때 분명 홍주로 존재했던 시대까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강한 향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홍성 존재해 오고 있는 시기에 역사적 ‘정통성’ 혹은 ‘정체성’이라는 것이 많이 취약해 졌거나 혹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홍주를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왜 홍주인가?’라는 질문을 해 본적도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 본적도 없으며, ‘홍주의 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 홍성에 홍주와 홍주의 얼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고, 알고 있는 분이 몇이나 될까? 아마도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많은 분들이 단편적으로 알고 있거나 혹은 무르거나(무관심에 기인한)일 것이다.
또한 홍주라고 이야기하면 많은 분들은 지금의 홍성읍 권역이 홍주의 중심이었을 것이라고 아무 의심 없이 생각할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사회, 경제, 문화 등의 활동이 행정 소재지를 중심으로 형성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상황이 좀 다르다. 홍주목사가 지금의 홍성읍에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고 보기에는 좀 어렵다는 얘기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홍주지역에서 경제와 문화가 융성했던 곳은 결성이다. 결성은 과거에 지금의 서부, 은하, 결성, 구항, 장곡, 광천을 아우르던 지역이다. 가장 번성했을 때는 보령까지도 아우르던 곳이 바로 결성이다. 그 이유는 오천항을 통해 오서산에 이르는 옹암포 물길과 수룡동을 거쳐 구항 보개산 밑까지 이어졌다는 수룡동 물길 등 두 개의 거대한 물길을 품고 있어 장시가 발달했으며, 어업과 농업을 병행(조선왕조실록)했으니 풍요로웠으며, 선비들이 많고 사람살이가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택리지)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것이다. 그래서 홍주의 인물들이 대부분 결성 땅에서 난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홍주와 결성의 우월성을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홍주의 얼에 대해 이야기 하고픈 것이다. 이렇게 결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배적 사상은 노론의 적통이다.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수암 권상하, 남당 한원진으로 이어지는 노론의 정수가 이 지역의 지배적 사상이었다는 것이다.
남당 이전에도 그 사상이 지배적 사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는 사상적 환경 또는 기반이 존재해 왔으며, 남당 이후에도 그러한 사상들은 남으로 인해 체계화 돼 더욱 지배적 사상으로 확고한 기틀을 만들었다. 그것이 홍주의 얼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홍주의 얼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홍주는 노론과 소론, 서인과 남인 등 다양성이 공존했던 곳이다. 그 다양성 중에서 가장 지배적이었던 사상이 노론의 적통이었다는 것이다.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