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바위, 풍성한 토굴새우젓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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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바위, 풍성한 토굴새우젓 마을
  • 전상진 기자
  • 승인 2009.10.3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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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⑤광천읍 옹암리
▲ 시집 못 간 처자들이 부러워하고 한탄할 정도로 풍성하고 인심이 넘치게 살았던 옹암리 마을 전경.


"광천독배로 시집 못가는 이내 팔자!"
 
홍성 인근에서는 30여년 전 시집갈 적령기가 된 처자들이 신세한탄을 하며 부러워한 마을이 있다. '광천독배로 시집 못 가면' 노래로까지 만들어 부러워하고 한탄할 정도로 풍성하고 넘치게 살았던 마을이 바로 바다 뱃길이 열리던 옛 포구마을 옹암리이다. 

옹암리(甕岩里)는 백제 때에는 결기군에, 신라 때는 결성군에, 고려 때는 보령현에 속했다. 조선 초엽에는 보령군에, 조선 말엽에는 보령군 청소면 지역으로 조선시기 내내 보령 관할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청촌, 양촌, 음촌 및 석포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옹암리라 하고 홍성군 광천면에 편입돼 뒤에 읍 승격에 따라 현재의 광천읍 옹암리가 됐다. 

 

 

 

 



토굴새우젓으로 이름난 옛 포구마을

옹암리는 광천의 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중앙에 독같이 생긴 바위가 있었다고 해서 '독배(독바위)마을'로 불린 옹암리는 서해가 만을 형성하며 내륙 깊숙이 들어 온 옹암 포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포구마을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시장과 상업이 발달한 마을이었다. 옹암포가 처음 생긴 시기는 18세기 말 이후로 당시 광천 소암리와 덕정리까지 배가 들어왔는데, 19세기 들어와 이곳이 더 이상 포구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고 옹암포가 본격적으로 광천의 포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옹암리는 '광천장'의 발전과 함께 번성을 누렸다. 특히 1887년 군산항 개항, 1923년 충남선 개통, 1931년 장항선 개통으로 광천장이 서해안 내포지역의 경제중심지이자 교통의 교차로가 되면서 옹암리도 광천장의 입구, 배후 시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옹암리의 전성기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돼 60년대, 70년대 초까지 이어진다. 옹암리의 전성기 때에는 장시가 열리는 당일과 장 안날에는 육지와 섬에서 들어오는 많은 외지인들로 언제나 넘쳤다. 외지인의 출입이 잦아져 그들을 상대로 한 음식점, 주막, 상점, 여관 등이 성행했고, 선박용구점을 비롯해 뱃짐을 운반하는 운수업도 활발했다. 이렇듯 옹암리는 경제적 기반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궁무진한 노동 기회를 주었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거리를 찾아 이 마을로 전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을 장날이면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렇게 번성했던 옹암리는 갯고랑에 토사가 쌓여 뱃길이 좁아지게 된 70년대 중반 이후부터 포구 기능이 약화되다가 90년대 후반에 농업기반공사로 물길이 들어오는 어귀에 방조제(보령방조제)를 쌓으면서 완전히 폐항된다. 옹암리 쇠퇴는 방조제를 쌓으면서 비롯됐지만 또 한편으로는 육상교통의 발달로 인한 수운교통의 쇠퇴도 한 원인이 될 수 있다. 

옹암포 기능이 쇠퇴하면서 마을 상황도 급격히 쇠락했다. 포구 상업에 종사했던 대다수 주민들은 다른 생계수단을 찾아 떠나거나 어렵게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포구가 쇠퇴한 뒤 마을은 얼마동안 침체를 겪었지만 옹암리는 언제까지나 침체의 늪에만 빠져있을 수는 없었다. 바로 마을 뒤편 '당산' 아래에 있었던 저장토굴 덕택으로 새우젓이 마을에 남게 됐다. 

 

 

 

 

 

 



옹암리 토굴과 새우젓이 만들어진 것, 여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1960년대에 마을에서 부지런하고 성실히 새우젓 상인을 하던 윤병원(만길, 2001년 작고) 할아버지는 마을 금광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데, 당시 산 중턱에 남아 있던 폐광 안에 50~60개 새우젓 독을 저장하는 시도를 했다. 폐광 안에 저장된 새우젓이 섭씨 14~15도를 유지하면서 숙성되어 보관상태가 양호할 뿐 아니라 맛도 독특하고 신선해 다음 해에는 포구 가까운 곳에 토굴을 파서 이곳에서 새우젓을 숙성시키기 시작했다. 윤 할아버지는 광산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인부들을 모아 직접 착굴을 해 3~5개월 동안 500드럼의 새우젓을 저장할만한 크기의 토굴을 만들었다. 이 소문이 마을주민들에게 퍼져나갔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 저장토굴을 너도나도 활용해 새우젓을 보관하게 된 것이다. 윤 할아버지는 '토굴새우젓'의 원조가 되었고, 마을주민들은 누구나 윤 할아버지의 공을 잊지 않고 있다. 대를 이어 '윤씨네토굴새우젓' 가게를 운영하는 손자 윤태호(41) 씨는 "할아버지 덕택에 대를 이어 장사하고 있다"며 "할아버지께 누가 되지 않게 정직하고 성실히 장사하고 있다"고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요즘에는 대대적인 홍보보다는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단골손님을 확보하는 게 더 낫다"며 뚜렷한 장사철학도 말한다. 현재 옹암리에는 20여개의 토굴이 남아 있는데 1개는 마을공동 토굴이고 나머지는 개인소유이다. 마을은 이 토굴 비법을 통해 포구가 막힌 지 30여년이 지난 뒤에도 새우젓을 마을의 경제상품으로 남기게 됐다. 

옹암리는 최근 10여 년간 토굴새우젓이라는 특산품의 전국 유일한 마을로 자리매김하면서 긴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행정기관과 마을주민들은 지역축제인 광천토굴새우젓축제를 개최하면서 저장토굴과 토굴새우젓의 상품을 홍보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 상권을 특화한 것이다. 새우젓으로 상권을 재정비하면서 옹암리와 광천의 지역경제는 상당한 정도로 활력을 찾고 있다. 

 

 

 

 

 

 



마을의 큰 일을 함께 나누는 네 마을

옹암리는 독배마을을 중심으로 양촌마을, 노동마을, 석포마을 등 네 개의 자연마을로 나누어진다. 

독배마을은 원래 상옹(위독바위), 하옹(아래독바위, 독바위개, 옹암포)으로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나누었으나, 지금은 마을이 하나로 합쳐져 옹암(독배)마을을 불린다. 마을구조는 가촌(街村)으로 도로를 따라 집들이 밀집해 선 모양으로 늘어져 있는 형태이고 상업중심의 전형적인 마을 모습을 보여주는 각성받이(각각의 성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전체 140가구 중 60여 가구가 새우젓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40여 가구가 마을액젓 공장에 다닌다. 20여 가구는 농업에 종사하는데 다른 농촌마을에 비하면 아주 영세한 편이다. 나머지 20여 가구는 건축 및 토목 공사 노동일을 하며 살고 있다. 김재환(55) 이장을 중심으로 개발위원회,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가 조직되어 마을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으며, 2007년 광천토굴마을 상인조합이 결성돼 새우젓 판로를 확대하고 특산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마을주민들은 음력 1월 6일에 토굴이 있는 마을 뒤편 당산에서 '당제'를 지낸다. 당제는 마을주민들의 삶의 방식인 경제활동을 반영해 장시의 번창, 풍어, 해상안전이 기원하며 시작했고, 2007년 이후 개발위원회 중심으로 마을 곳곳을 돌며 거리제를 올리고, 당산 신목에서 당굿을 하며 당 내부에서 산신, 본당신, 오방대장군으로 옮겨가 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각 가정의 안락을 빈다. 

김재환 이장은 "마을발전을 위해 항상 애쓰겠다"며 "독배 토굴새우젓을 전국 최고의 명품으로 만드는데 앞장서겠다"고 포부를 말한다. 

 

 

 

 

 

 



독배마을 옆으로 장항선 철길이 있는데 이 철길을 건너면 옹암리 나머지 세 자연마을이 나타난다. 독배마을과는 달리 세 마을은 새우젓 관련업종의 일을 하는 가구는 전혀 없다. 우선 양촌마을(윗삼분이)은 햇살 가득히 담겨 보기에도 아늑하고 포근한 마을이다. 전체 90가구 중 반은 농업에 종사하고 나머지 반은 자영업 등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안경수(60) 이장은 "작은 마을이지만 화목한 마을"이라며 "마을이 비록 넉넉하지는 않지만 똑똑하고 배움이 많은 사람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편호범 감사원 감사위원이나 장석화 전 국회의원이 이 마을 출신"이라며 살기 좋은 마을을 자랑한다. 그리고 "팔각정 농막을 지난 7월 진광토건 안홍수 대표가 지어줘 여름철 마을노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안 대표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 아래쪽에 자리한 노동마을은 예전 바닷물이 마을까지 들어온 곳으로 갈대가 많아서 갈대골, 갈닷골, 갈닷굴, 깔다꿀어로 불리고 있는데 전체 32가구 78명이 살고 있다. 한병구 이장(66)은 "우리 마을은 상당히 낙후된 마을이라 마을 앞이 막혀 주민들이 통행에 불편을 겪어왔는데 1995년 마을주민들과 출향인들을 설득 2700만원을 모금해 마을안길을 확․포장했고, 철로도 출향인들이 힘을 보태고 철도청과 협의해 암거공사도 완성할 수 있었다"며 "이 일로 하는 조건으로 마을이장을 쭉 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즘 한창 간이상수도 공사를 하고 있는 한 이장은 "상옹 고지대에 있는 10가구에 공급하던 상수도가 너무 낡아 누수돼 지금 공사 중"이라고 이웃마을과의 화합도 말한다. 

노동마을에서 철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아차산이 나오는데 아차산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하늘이 처음 열릴 때 산을 들고 가다가 놓치고 '아차'하는 바람에 아차산이란 이름이 지어졌다는 산 밑이 바로 석포마을(석포리, 돌개)이다. 47가구 100명이 살고 있는 마을은 철길이 놓이기 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왔다. 광천읍내에서 제일꽃집을 운영하는 이종석(51) 이장은 "우리 마을주민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지만 산 밑 마을이라 경지가 좁고 밭이 많다"며 "마을에서는 주로 축산업을 많이 하는데 앞으로 소, 돼지 등을 사육하는 축산단지를 조성해 잘사는 마을을 만들고 싶다"고 계획을 말한다. 

옹암리는 '토굴새우젓'으로 유명한 독배마을이 중심이지만 마을 당제와 같이 큰일을 할 때는 다른 마을도 참여해 함께 하는 합심이 잘 되는 마을이다. 앞으로 옹암리 토굴새우젓이 수입새우젓과 새우젓 소비감소에 맞서 일정한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 마을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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