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역사 속에 서민의 삶을 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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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역사 속에 서민의 삶을 간직하다
  • 박수환 기자
  • 승인 2009.11.2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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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⑦결성면 성곡리

 

 


홍성읍에서 구항 방면 구성남로를 달리다 결성농공단지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서민들의 진솔한 삶을 느낄 수 있는 결성면 성곡리가 나온다. 넓은 논과 축사에서 울리는 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성곡리는 토성 벽과 형산 사이를 굽이굽이 들어가는 오솔길처럼 형성돼 있다. 

18개 작은 마을로 형성된 성곡리

결성면 성곡리는 신금성이 있던 곳으로 백제․신라․고려 때까지 읍 치소였다. 1400년경 결성읍성을 개축하고 결성의 북쪽이 된다해 금곡리와 성곡리를 포함, 성북리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박철리․신대리․성대리를 병합해 성곡리라 불리게 됐다. 현재 성곡리는 박철마을과 원성곡 마을이 있다. 

박철마을은 갓에 있는 고개에 서당이 있었던 가재울, 뒷산에 돌이 많아 석산이라 불리던 독뫼, 신금성 변두리에 모자가 살던 집이 있던 모잣골, 대밭고랑이에서 구워낸 기와로 지은 절이 있었다는 박철, 마을사이를 이어 방앗간이 있던 방앗간모랭이, 산지기의 집이 있던 산직말, 고려 이전부터 현의 옥이 있던 자리라 해서 옥방골, 세종때 누에 치는 일을 장려한 잠방이 있던 잠방골, 결성현의 군사들이 진영을 세웠던 진번던, 신금성 안쪽 마을이라는 터안 등 9개의 작은 마을이 모여 이루고 있다. 

또한 원성곡마을은 골짜기가 있는 공터굴, 대단히 큰무덤이란 뜻을 지닌 말무덤, 신금성 안에 향리들이 방축을 쌓고 살던 방죽골, 네거리에 위치해 많은 비석이 있던 빗독거리, 형산리로 가는 고개에 성황당이 있었던 산골재, 말무덤 동남쪽에 새로 생긴 새터말, 신금성 터가 있던 곳으로 테를 두른 것처럼 생겨 테성미, 큰바위가 많은 한바위, 고려 때 향관이 살았던 향교터 등 9개의 작은 마을이 합쳐져 있다. 

두 마을은 모두 형산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는데 이 형산은 다른 말로 저울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옛날 무게를 재던 저울과 닮았다 해서 저울산이라 불리는데 저울 형(衡)을 써 형산이라고도 불린다. 저울산 옆에는 풍수지리상 청룡이 있는 자리에 산이 있어 청룡산이 자리하고 있고, 형산 옆에 저울질 할 때 쓰는 추(錘)를 닮은 거산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미륵불이 지켜주는 원성곡마을

박철마을의 유래는 많이 전해지는데 그중 3가지가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한다. 첫째 고려시대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절의 주지 스님 성이 박 씨라서 '박절'이라 불리다 '박철마을'이 됐다는 유래와 때밭고랑에서 제작한 특수무늬 기와를 써 건립한 절이 있어서 '박철마을'이 됐다는 유래, 마지막으로 철과 금이 뒤섞여 있는 마을이라서 '박철마을'이 됐다는 유래가 있다. 현재 고려시대에 있었던 절은 밭으로 변했고, 절 옆에 있던 비자나무도 언젠가 주인이 팔아버려 그 터만 남아있다. 

 

 

 

 

 

 

박철마을은 만해 한용운 선사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만해 한용운 선사는 1879년 박철마을 잠방골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다. 만해로를 따라 들어가면 나오는 생가지는 낮은 야산을 등진 들판 쪽에 자리했던 것을 1992년에 복원했다. 생가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 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매년 만해 한용운 선사를 추모하는 제향에는 마을사람 모두 참여한단다. 

원성곡마을은 적지뜰과 장수바위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적지뜰은 원성곡마을 도로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빨간 흙이 나온다고 해서 적지뜰이라고 하지만 도적 적(賊)을 써 도적이 있는 곳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적들한테 마을을 지키기 위해 형산에 장수가 항상 적지뜰을 바라보고 서 있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 장수가 죽으면서 마을을 지키기 위해 돌이 되었다는 장수바위가 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이 매년 1월 14일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는 자연미륵불이 있다. 자연미륵불은 마을 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며 100여년 전부터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오고 있었는데, 지난 1999년 미륵불이 도난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마을주민들은 기원제를 지내지 못한 해는 불미스런 일이 많아 발 벗고 찾기에 나서 지난 2000년 1월 5일 결성면 형산리 구수동에서 발견된 자연미륵불을 원래의 자리에 안장시키고 지금까지 기원제를 지내고 있다.

만해 한용운 선사가 태어난 박철마을
 
박철마을(이장 이대균)은 43가구 98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양돈을 하는 1가구, 한우를 키우는 6가구를 제외하곤 모두 농사를 짓는 마을이다. 마을은 특히 오래사시는 분이 많아 장수마을로 유명하다. 현재 90세를 넘긴 노인이 3분이 계시고, 80대 노인도 많이 있다. 장수마을 노인회장인 이익화(80) 씨는 󰡒공기가 좋아 오래 사는 것 같다. 특별히 먹는 것을 가리는 것도 아니고, 건강을 위해 운동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걱정 없이 하루하루 보내는 것이 건강을 비결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 진달래가 많이 있던 꽃밭등성이가 있다. 하지만 이 꽃밭등성이도 간간히 보이는 꽃을 제외하곤 경작지를 넓히는 과정에서 없어져 버렸다. 꽃밭등성이 앞은 기와공장이 있던 때밭고랑도 자리한다. 기와공장이 있었던 터라 그런지 밭을 맬 때 간간히 깨진 기와가 나온다고 한다. 마을에선 매년 2월 초하루날엔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열심히 일하자는 의미로 윷도 놀고 잔치를 벌인다고 한다. 이 이장은 󰡒볼거리가 많은 마을이었지만, 이야기로만 전해지고 지금은 터만 존재하고 있다. 남아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지라도 보존을 잘해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소소한 삶 속에 기쁨을 누리다

새마을사업이후 경작지가 넓어진 원성곡마을(이장 이천범)은 결성면에서 수확되는 벼 중 10%를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많은 벼를 수확한다. 현재 60가구 140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양돈 1가구와 한우를 키우는 4가구를 제외하고 벼농사를 짓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또한 건너편엔 결성농공단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 이장은 󰡒마을에 특별히 잘난 것이 없는 것이 자랑이다. 새마을 사업을 하기 전엔 외부와 격리된 마을이라 배운 것도 없고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한 마을이었지만, 마을에 물이 많아 새마을사업 때 밭을 모두 논으로 바꿔 경작하면서 부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결성면에 있는 25개 마을 중 벼 수확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 이 이장은 "주민들이 어려웠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마을 발전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선다󰡓며 󰡒마을의 주차장 2곳과 회관은 주민들이 조금씩 땅을 기부해 만들었다. 마을에서 사업을 한다고 하면 주민들이 먼저 단합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원성곡마을 경로당은 다른 마을보다 활성화가 잘 돼 있다. 최용식(72) 노인회장은 "25명이 당번제로 돌아가면서 경로당을 운영한다. 당번이 되는 날은 9시에 경로당에 나와 기본적인 정리정돈을 하고 참이나 약주 한잔하는 비용도 당번이 부담한다. 오후 4시쯤 되면 경로당 주변까지 정리를 하고 퇴근을 한다. 직업은 아니지만 출․퇴근 시간이 있어 호응이 좋은 편이다"고 말했다. 

서민들의 소소한 삶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주민들은 "앞으로도 지금만 같으면 좋겠다"며 오늘도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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