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기범 강사 특별초청 강연 ‘광천(廣川)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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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기범 강사 특별초청 강연 ‘광천(廣川)을 말하다’
  • 황희재 기자
  • 승인 2022.07.01 08: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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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광천문예회관에서 ‘편기범 국제웅변협회장’ 특강
‘광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비전’에 대해 90여 분 간 역설
읍민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솔직함과 호소력에 박수갈채 쏟아져
광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비전에 대한 강연을 펼치고 있는 편기범 국제스피치학회장.

8232. 오늘날 광천의 현실을 말해주는 숫자다. 혹자는 광천의 인구를 나타내는  이 숫자가 광천이 가진 총 재산이라고도 한다. 오래전 광천은 오일장이 서는 4일과 9일, 장안날인 3일과 8일이면 150척이 넘는 배가 드나들 정도로 크게 번성했다. 그 시절 광천장은 충남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고, 광천의 옹암포는 원산도와 안면도 등지에서 뱃사람들이 각종 해산물을 팔기 위해 몰려드는 서해안 최대 관문이었다. 광천장에 해산물을 판 뱃사람들은 다시 광천장에서 장비와 식량 등 장기간 사용할 생필품을 가득 구입해 배에 올랐다. 당시에는 물물교환도 빈번했다고 한다.

노래 ‘흥타령’에 “광천 독배로 시집 못 간 내 팔자야”라는 구절까지 등장할 정도로 당시 광천에는 알부자가 많았다. 특히 이 옹암포 토굴에서 익힌 광천새우젓은 1960년대부터 전국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지금도 마을사람 대부분이 새우젓 가공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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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장 서는 날 150척 넘는 배 드나들기도…
흥타령엔 “광천 독배로 시집 못 간 내 팔자야”
선택의 갈림길 앞에 놓인 국운, 그리고 광천(廣川)

‘인구소멸’과‘지방소멸’ 가속화… 막을 방법 없나 
지난해 광천으로 귀향, 돌아온 고향은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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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지 않는 항구도시 광천은 1970년 안면도와 태안반도를 최초로 연결한 안면연륙교가 개통하면서 조금씩 노을 지기 시작했다. 연륙교가 생기자 안면도 사람들은 서산으로 장을 보러가기 시작했고, 사금을 캐던 배로 인해 항구 바닥에 흙모래가 쌓여갔다. 이후 토사 유입으로 수위가 낮아져 배의 출입이 어려워지고, 옹암포를 통해 광천장에 들어오던 수많은 해산물은 보령과 인천 등 다른 항구로 가버리고 말았다. 전성기 시절 광천의 인구는 지난 5월 기준 광천읍 총인구수인 8232명의 3.5배나 되는 2만 8000여 명에 달했다. 이렇듯 인구는 한 지역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예측을 허용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영국의 인구학자 폴 몰런드(Paul Morland)는 저서 ‘인구의 힘’에서 “인구학은 삶의 일부이며 어떤 면에서는 삶 그 자체다. 출생, 이주, 결혼, 죽음은 인생의 큼직큼직한 이정표다. 인구학이 그러한 일들을 총체적으로 살펴본다고 해서 인구학의 관찰 대상인 개인의 삶과 경험이 지니는 가치와 고결함이 훼손되지는 않으며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 인구학자와 역사학자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합계를 내고 일반화하는 특권을 지닌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다루는 숫자가 모든 개개인이 품는 희망, 사랑, 두려움의 총합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의무도 따른다”라고 설명한다.

인구는 경제, 정치, 국방, 문화 등 인간이 이룩한 문명사회 전 분야에 걸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변수다. 때문에 인구에 의해 국가의 운명과 역사의 흐름까지 좌우된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6·25전쟁 직후와 비교했을 때 50년도 채 되지 않던 기대수명이 20년 이상 늘어났고, 인구증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영아 사망률도 1000명당 138명에서 3명으로 줄어든 상황이다. 

하지만 같은 기간 우리나라에서 한 여성이 낳는 평균 자녀수는 6명에서 1명을 간신히 넘긴 수준으로 감소했고 1980년 이후 취학 아동 숫자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7년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총인구의 14%를 넘어서며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오늘날 대한민국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국가의 미래에 먹구름을 몰고 온 ‘인구소멸’과 ‘지방소멸’이라는 낯선 개념은 눈 깜짝할 사이 사회의 거대 담론으로 자라났다. 뚜렷한 해결책은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역사의 갈림길 한가운데 있다.

지난 23일 광천문예회관에서는 대통령상을 3회나 수상한 광천 출신 명연설가 편기범 국제스피치학회 회장의 특별 강연이 열렸다. 편기범 회장은 이날 객석을 가득 채운 주민들 앞에서 ‘광천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약 90분간 광천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말했다.
 

청중들은 9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강연에 집중했고, 공감되는 발언이 이어질 때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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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기범 특별초청 강연 요약
 

“광천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는 여러분! 부디 가장 인간적인 진실만이 인간을 설득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뛰십시오. 그리하면 한때의 실패가 있을지라도 곧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 후의 실패는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호소력 짙은 이 문장은 편기범 회장의 저서 ‘선거 연설의 방법과 실제’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편 회장은 광천에서 태어나 광천중학교, 대전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고위 정치인을 비롯해 국내의 수많은 저명인사들을 지도한 웅변인이다. 이날은 20세기 격동의 현대사와 광천의 흥망성쇠를 두 눈으로 목격한 한 사람으로서 연단에 올랐다.  
 

1970년대 광천 옹암포구 모습.

 

광천, 과거와 현재



■ 읍민이 우리가 가진 재산입니다
1970년대. 그 때 까지는 초등학교도 많았습니다. 저는 광천중학교 14회 졸업생입니다. 14회 때는 여자 1학급 남자 3학급이 졸업했는데, 10년 뒤인 24회 때는 60명씩 7개 학급이 졸업했습니다. 그 때가 바로 광천의 최고 정점 2만 8000명 시대입니다. 그 때는 보령, 태안, 서산, 당진, 청양에서 광천까지 장을 보러 왔습니다. 물이 들어오고, 장 서기 전날에 이미 배가 80~90척까지 들어왔습니다. 안면도, 원산도, 효자도, 외연도 등 10여 개 섬에서 3~4일 동안 그물 쳐서 잡은 물고기, 배에서 잡은 해산물을 전부 싣고 광천으로 모였습니다. 장안날(장이 서는 전날) 500명이 넘는 사람이 광천에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광천에는 장이 2번 선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광천 독배로 시집 못간 내 팔자야’ 그 가사가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어릴 때 기억으로 광천은 나라가 어려운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뱃사람들이 공짜로 먹을 것을 나눠줬을 정도로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습니다. 우선 생선이 많았고, 돈이 도는 곳이었습니다. 지금의 원양어선과 같은 배가 있었는데, 이 뱃사람들은 3개월 치 식량과 장비를 싣고 광천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광천에는 철물점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저는 어릴 적 이곳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냈습니다. 

이렇게 제 머릿속에는 영광스런 광천의 모습이 뚜렷하게 박혀 있는데 고향을 내려 올 때마다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눈물이 나고, 화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광천은 안면도에서 태안반도를 잇는 연륙교가 개통되면서 노을 지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승만 정부에서 고위 관료를 지낸 임영신 씨(1899~1977) 소유 회사의 배가 광천에서 사금 작업을 하면서 갯도랑이 덮여 큰 배들이 들어오지 못 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반면 대천에는 어항과 방파제가 생겨 큰 배들은 모두 모여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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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암포 금배(1960~75년경) 삼응광업소 채금선.

 

65세 이상 노인 3000명 넘어
광천은 어르신들이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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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광천 우시장 모습.

이후 광천에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 서울에서 건물을 사고, 집을 사고, 땅을 샀습니다. 광천은 계주가 도망가는 곳, 피해자들만 남은 곳이 돼버렸고 생계가 어려워진 주민들은 할 수 없이 사채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주먹 쓰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소매치기도 늘었습니다. 

지금 광천의 인구는 8200여 명입니다. 그리고 65세 이상 노인이 3000명이 넘습니다. 광천은 지금 어르신들이 이끌어가고 있는 지역입니다. 새우젓 가게가 120개, 김 공장이 37개, 김 가게가 140개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게 바로 우리의 총 재산입니다. 광천읍민이 재산입니다. 똘똘 뭉치지 않고서는 꿈을 이루기 힘듭니다. 광천 주민들끼리 선의의 경쟁을 펼쳐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옆 가게와 갈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장사가 안 되니 그런 것입니다.

지난해 8월 광천으로 주소를 옮기며 가구를 하나 사려고 하는데 살 곳이 없어 금마까지 다녀와야 했습니다. 언제 우리 광천이 이렇게 쇠퇴했나 마음이 답답하고 서글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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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의 미래 비전



■ 정직해라, 친절해라, 뭉쳐라
광천은 현재 대학 캠퍼스 2개가 들어와도 발전하기 힘든 현실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지방대학들은 정원을 채우기 힘들 것입니다. 준비 중인 철도가 개통되면 서울, 수도권과의 이동시간이 줄어들어 학생들은 통학을 할 것입니다. 방을 얻는 학생은 줄어들 것입니다. 

얼마 전 홍주신문에서 지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홍성에 주소를 옮기면 6개월마다 20만 원씩 최대 160만 원을 지원해준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하지만 돈을 주는데도 주소 옮기는 학생이 별로 없습니다. 대기업이나 큰 공장이 이곳에 온다고 해도 현실을 바꾸긴 어렵습니다. 누구는 큰 공장이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수십 가지 방안 중 하나 일뿐 결정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다시 냉철하게 생각해봐야합니다. 광천에 예당저수지 같은 자원이 있습니까? 덕산처럼 온천수가 나옵니까? 대천처럼 해수욕장이 있습니까? 오서산에는 인공폭포 하나 만들 자리가 없다고 합니다. 우린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는 옛날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에서 지금 우리 광천과 같은 지역 사람들이 살아날 길을 찾아봤습니다. 우리나라는 북한보다 국민소득이 적었던 가난한 나라, 자원빈국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일으킨 것은 부지런함과 국민의 단결력이었습니다. 서울의 장충체육관은 과거 필리핀에서 온 고급 기술자들이 지은 건물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한 지도자의 역량으로 인해 필리핀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일을 하기 위해 들어오는 나라가 됐습니다. 국민들과 지도자의 의식에 따라 지역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꿈을 꾸는 건 자유입니다. 우리는 조그만 것도 허투루 보지 않고 하나씩 실천해나가야 합니다. 광천에서 사업하는 모든 사람은 기술보다 정직이 먼저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바가지 없고, 중국산 없다” 이런 말이 널리 퍼져야 합니다. “광천은 믿을만하다”라는 말이 나오도록 고객의 마음을 사야합니다. 김 장사는 김을 파는 게 아니라 마음을 사야합니다. 저는 우리 광천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 바가지 씌우지 않는 곳, 지갑을 잃어버려도 온전히 찾을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랍니다. 좋지 않은 소문이 한 번 나면 그것을 만회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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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7년 열린 제2회 광천토굴새우젓·조선김 대축제 행사 모습.

첫째는 정직하자, 둘째는 친절하자. 친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친절을 베푸는 일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생명이자 근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시장을 찾은 손님에게 “들어와서 잠깐 보고가세요”라는 말 말고 “광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로 바꿔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10년 후 광천시장 상인의 입에서 “광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소리가 나오면 저는 오늘 이 자리가 보람 있었다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광천에서 영업하는 택시가 18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택시도 외지에서 온 손님을 태우면 친절해야 합니다. 친절로 철저히 무장한 사람만이 진정한 프로입니다. 조금 더 벌려고 바가지 씌우다 큰 손님을 잃습니다. 

우리 광천 사람은 사업할 때 야무지게 하자. 퉁명스럽고 우직한 충청도 고집을 버리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꿈꾸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광천의 발전과 완성을 위해 정직과 친절을 기본으로, 프로의 자세를 갖고 광천의 시장을 번영시킵시다. 모든 사회단체가 광천 발전을 목표로 두고 노력해야합니다. 대학과 기업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주도적으로 해나갑시다. 

또, 정치인은 표가 많은 데를 찾아오게 돼있습니다. 표가 많아야 눈치를 보기 때문에 인구가 많아야 하고, 인구가 없을수록 단합을 해야 합니다. 이들이 출마하기 전부터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며 힘을 모읍시다. 뭉쳐야 합니다. 그러면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광천 발전을 위해서 큰 일 작은 일 가릴 것 없이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서 인재로 만들어야 합니다. 떠드는 사람이 아닌 실천하는 사람 말입니다. 만약 그 인재가 국회의원 감이라면 국회의원이 돼서 대통령 앞에서 무릎을 꿇고서라도 광천 발전을 얘기할 것입니다. 당을 떠나서 광천 발전을 위해 사정하고, 빌고, 무릎까지 꿇을 수 있는 사람을 기릅시다.

끝으로 광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도 여러분을 환영하는 편기범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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