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내 것 같아요 <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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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내 것 같아요 < 20 >
  • 한지윤
  • 승인 2013.08.2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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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가 쓰는 청소년소설
"형이 없으니까 집안이 텅 빈 것 같아."
"내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현우가 몇 걸음 앞으로 나서 애꿎은 나뭇가지를 홱 잡아 꺾었다.
"집안 분위기가 폭풍전야 같아. 아버지는 매일 늦게 들어오시고. 나도 학교 끝나면 발걸음이 천근만근이 된단 말야."
경우의 호소 섞인 말에도 현우는 꺾어든 나뭇가지만 툭툭 잘게 자르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굳이 경우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아버지의 얼굴이 만들어내는 집안 분위기는 충분히 상상이 되고도 남았다.
"둘이 아는 사이냐?"
아까부터 물끄러미 둘을 지켜보고 서 있던 왕순이 어느새 다가와서 현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하다가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왜 이렇게 분위기가 소금 탄 커피 맛이냐."
쾌활한 왕순의 성격이 이런 순간에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을 현우도 알고 있었다. 분위기를 바꾸어보려는 왕순의 과장된 표정을 보면서 현우가 경우의 어깨를 감싸고 왕순에게 소개했다.
"응, 내 동생이야 형. 경우야. 인사해라. 내가 형처럼 따르는 사람이야. 생긴 건 이래도 인간성은 괜찮아."
경우가 빙긋이 웃으며 목례를 했다. 왕순이 악수를 청하며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눈과 입술이 붓고 핏자국이 번져 좀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길쭉한 얼굴형과 창백한 피부색이 현우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반갑다. 왕순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유덕화라고 부르지."
'유덕화'라는 말에 힘을 주며 왕순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유덕화만은 못해도 계집애처럼 선이 고운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경우가 손을 내밀어 잡았다.
"오경우입니다."
"현우하고는 딴판인걸. 넌 모범생 같은데. 현우 때문에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시지?"
왕순의 질문에 경우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현우가 왕순의 등을 떠밀었다.
"형. 몸도 아플텐데 어서 들어가. 난 경우 바래다주고 들어갈게."
"그래 알았다. 이 녀석아."
간섭을 싫어하는 현우의 성격을 잘 아는 왕순은 괜히 집안 얘기를 꺼냈다고 후회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동생도 왔으니 이만 집에 들어가 보도록 해. 고집 그만 피우고."
"알았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형은 어서 들어가서 멍든 얼굴에 달걀찜질이나 해."
현우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 왕순은 경우에게 슬쩍 손을 들어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경우는 자기 가방을 대신 메고 앞서 걸어가고 있는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며칠 사이에 많이 수척해진 모습에 경우는 속이 상했다. 형이 무슨 말이든지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몇 년 사이에 형은 너무나 많이 변했다. 어릴 땐 누구보다 다정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말을 잃었다. 눈빛도 점점 거칠어지고. 특히 아버지를 대하는 모습은 유난스러웠다. 아버지를 대할 때면 도무지 예의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아니, 형은 일부러 아버지를 괴롭히려는 것 같았다. 형이 사고를 칠 때마다 학교에 불려가는 아버지의 슬픔, 절망, 분노를 형은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건 최근의 일이었다. 처음엔 그런 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왜냐하면 형이 깨어버린 것은 자기 자신의 행복 뿐 아니라 가족 모두의 행복이었기 때문이었다. 형이 변해가는 것과 동시에 가족들 사이에 오가던 따뜻한 말들도 사라졌다. "밥 먹어라"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무미건조하고 삭막한 한마디씩만 가끔 오갈 뿐이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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