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병의 전개와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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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의 전개와 역사적 의의
  • 충남대 국사학과 김상기 교수
  • 승인 2018.08.21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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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 유학<8>
홍주의병 기념탑 준공비에 있는 홍주의병상.

1896년·1906년 2차에 걸쳐 전개… 사상적 연원 인물성이론의 한원진
유생들 김복한을 총수 추대해 반개화 반침략론 실천에 옮긴 반일투쟁
반침략무장투쟁 전개 타 지역 의병봉기 영향 3·1운동 인적·사상적 계승


■ 홍주의병의 배경
홍주의병이란 홍주군(현, 충남 홍성군)을 비롯한 홍주문화권 내에서의 의병항쟁을 말하는 것으로, 1896년과 1906년의 2차에 걸쳐 전개됐다. 홍주의병의 봉기를 가능하게 한 정치적·사회적 요인으로는 갑오변란과 을미사변, 변복령과 단발령의 공포 그리고 을사조약의 늑결 등을 들 수 있다. 홍주의병의 사상적 연원은 조선후기 한원진(호; 南塘, 1682-1751)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원진의 사상은 사람과 동물의 성품이 같을 수 없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이 특징이다. 이 이론은 중화와 이적의 구별을 엄격하게 하는 존화양이론의 성격을 띠는데, 홍주일대 유생들에게 전수돼 생사를 초월한 의병을 일으키도록 한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1895-1896년 홍주의병
1895-1896년 홍주의병은 안창식 등 유생들이 김복한을 총수로 추대해 반개화 반침략론을 실천에 옮긴 반일투쟁이다.

안창식은 청양유생 채광묵 등과 함께 1895년 11월 28일 화성에서 향회를 실시해 의병 활동을 결의하고 180여명의 민병을 모집했다. 다음날 안창식의 아들인 안병찬과 채광묵이 이들을 인솔해 홍주성에 들어갔다. 12월 1일 저녁에는 정산과 청양의 이봉학, 이세영, 김정하 등 수백 명이 성안에 들어왔다. 12월 2일 박창로가 수백 명을 데리고 왔으며, 청양의 이창서는 청양군수 정인희의 명령에 따라 수백 명을 인솔하고 홍주성에 집결했다.

김복한은 안병찬, 이봉학, 이상린 등과 비밀히 연락을 취해 의병 봉기를 준비해 왔다. 김복한은 12월 2일 수백 명의 민병이 관아에 집결했을 때 거사하기 앞서 경무관 강호선과 참서관 함인학의 목을 베어 높이 걸어 관찰사의 뜻을 굳혀야 한다고 했다.

관찰사 이승우는 이들을 살려줄 것을 호소하고 결국 의병에 참여하기로 햇다. 이들은 다음날 홍주관아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 만에 관찰사가 배반하고 김복한 등 23명을 구금시켰다. 이들 중에 김복한 등 6명은 법부의 훈령에 압송돼 1월 17일 한성재판소에 이송됐다. 이들은 2월 25일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에 의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임금의 특지로 전원 사면 석방됐다.

홍주지역 유생들은 의병의 재기를 시도했다. 이근주는 서산 태안방면으로 가 의병을 모집하던 중 의병장들의 석방소식을 듣고 중지했다. 그 후 청양으로 전 수사 조의현을 찾아 거의하려고 계획했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1910년 국치를 당하여는 왜놈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자결했다.

안창식은 관찰사의 소행과 더욱이 안병찬이 자결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의 재기를 시도했다. 청양군수 정인회는 12월 6일 정산읍에 진을 치고 일어났다. 12월 7일 공주를 향해 진격하던 중 정산의 철마정 일대에서 공주부에서 파견한 구완희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세영은 남포에서 황재현, 이관, 김홍제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상의 일자는 음력임, 이하는 양력)

■ 1906년 홍주의병의 봉기
1896년에 홍주의병을 주도했던 안병찬을 비롯해 채광묵, 박창로, 이세영 등은 을사조약의 늑결 소식을 듣고 의병투쟁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했다. 이들은 정산에 거주하고 있는 전참판 민종식을 찾아가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홍주의병은 1906년 3월 15일(음, 2월 21일) 예산군 광시에서 첫 깃발을 들었다. 이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홍주성을 향해 진격했다.

홍주의 동문 밖 하우령(일명 하고개)에 진을 치고 홍주성을 공격했으나 관군의 저항에 후퇴해 화성의 합천일대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안병찬과 박창로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체포됐다. 의병장 민종식은 간신히 탈출해 각지를 잠행하다가 이용규 등과 5월 9일 부여의 지티에서 재기했다. 이들은 서천, 남포읍성을 함락하고 결성을 거쳐 5월 19일 홍성 시내에 들어왔다.

홍성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의병부대는 5월 20일 아침에 홍주성을 점령했다. 홍주성에서 패주한 일본군은 공주 병력을 지원받아 홍주성을 둘러싸고 공격을 감행했으나 의병부대는 이를 격퇴시켰다. 서울에서 경무고문부의 하이바라(排原) 경시와 조선 경무관 및 그 부하 20명이 증파됐으나 일본 경찰을 체포해 처형했다. 그러자 통감 이토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파견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 보병 제60연대 대대장 다나카(田中)소좌 지휘하의 보병 2개 중대는 기병 반개소대와 전주수비대 1개 소대와 합세해 30일 홍주성을 포위했다. 의병 측에서도 방어태세를 정비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우세한 화력과 전투경험이 많은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다나카 소좌의 지시에 따라 30일 밤 11시에 동문에서 약 500미터 지점 숲속에 잠복했으며, 31일 오전 2시 반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일본 보병과 헌병대, 경찰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문 안으로 진입했다.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해 의병부대의 퇴로를 차단했다. 31일 오전 4시경 홍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됐다.

일본군은 기마병을 시켜 의병을 추격 사살케 했다. 이때 양민 역시 다수 희생됐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이 10여 명 사살된 반면 의병측은 참모장 채광묵 부자와 운량관, 성재평과 전태진, 서기환, 전경호를 비롯해 300여 명이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체포된 의병의 수는 145명에 이른다. 그 중에 김상덕 등 78명은 서울로 압송됐다. 이들은 일본군 사령부의 심문을 받고 윤석봉 등 70명은 7월에 석방됐다. 그러나 유준근, 안항식, 이상구, 신현두, 이식, 남규진, 최상집, 문석환 등 9명은 대마도로 유배돼 감금생활을 했다. 이세영은 6월 체포돼 겨울에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황주의 철도에 유배됐다.

홍주성전투에서 패퇴한 민종식 등은 성을 빠져나와 재기의 계획을 세웠다. 예산 현곡에 있는 이남규의 집에서 이남규, 이용규, 곽한일, 박윤식, 김덕신, 이석락 등이 모여 거의를 계획했다. 이들은 11월 20일 예산을 공격해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하고 민종식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헌병 10여명과 지방병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 십 명의 포위 습격을 당해 곽한일, 박윤식, 이석락 등이 체포됐다. 이남규, 이충구 부자도 함께 체포돼 온갖 악형을 당했다. 이때 체포된 곽한일을 비롯해 박윤식, 김덕진, 정재호, 황영수, 박두표 등은 종신 유배형을 받고 전라도 지도로 귀향 갔으며 홍순대, 김재신은 고군도로 귀향 갔다. 민종식은 11월 20일 체포돼 1907년 7월 3일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에 처해져 진도에 종신 유배됐다. 이로써 예산에서의 재기는 좌절되고 말았다.

■ 역사적 의의
홍주의병은 한말 의병전쟁을 선도해 간 대규모 무장투쟁이며 한민족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한 독립전쟁이었다. 김복한과 민종식 부대는 의병을 일으키고 통문과 격문을 발표함은 물론 각국 공사에게 독립청원서를 제출했으니 이는 국제적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의병전쟁을 전개한 것이다. 홍주의병은 타 의진에 비해 유생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는 병사층에 유회군이 다수 참여하고 있으며 편제에서도 타 의진과는 달리 유병장 제도를 두어 남포의 유학자 유준근을 초빙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홍주의병은 강렬한 반침략무장투쟁을 전개해 타 지역의 의병봉기에 끼친 영향이 크며 1910년대 독립전쟁과 나아가 3·1운동으로까지 인적. 사상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 할 것이다.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매헌연구원 김상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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