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해정(浮海亭)에 녹아 있는 홍주의 처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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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해정(浮海亭)에 녹아 있는 홍주의 처사 문화
  • 손세제 <철학박사>
  • 승인 2018.10.0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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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 유학

구차한 삶 싫어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산 사람들 처사
몸과 마음 모두 유학의 정신과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들
유학 목표 인간다운 삶의 실현 나, 인간다운 존재 만들어
유학의 이상 ‘충서’에 따 민생의 이익에 전념한 처서들 


‘처사(處士’)의 원의는 재덕(才德)은 있지만 은거(隱居)해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인(士人)을 가리키던 말이다. 그들은 자처(自處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처신함)하기를 좋아했고 생전에 이름이 들리는 것을 구하지 않았다. 고대에는 벼슬하지 않을 경우 평민의 신분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모든 남자들은 벼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벼슬을 하게 되면 원하지 않는 일, 도의에 어긋난 일도 서슴없이 해야 했기 때문에 덕이 높은 고사(高士)들은 구차한 삶을 싫어해 처사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예가 종종 있었다. 공자도 제나라에서 돌아온 뒤 처사의 삶을 영위한 적이 있으며 삼도를 허무는 일(“墮三都”)이 실패한 후 천하 유력을 떠났을 때 한 동안 처사의 삶을 동경한 적이 있다.

처사는 구차한 삶을 싫어해 평민으로 살아갈망정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산 사람들이다. 출사를 하게 되면 많은 혜택을 받지만 그 대가로 왕에게 충성을 서약을 해야 한다. 그러나 출사를 하지 않으면 군신 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부당한 요구에 대해서는 명을 따를 필요가 없고 충성을 바쳐야 할 의무도 없다. 춥고 가난하며 고통스런 삶을 영위해야 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관리들의 제재를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왕이나 관리 입장에서는 처사들의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고 또 성가시게 여겨졌지만 이들을 제재할 방법이 법 테두리 안에 없고, 또 이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출사 때문에 자신들은 실현하지 못하는 유학의 이상이었기 때문에 외경(畏敬) 차원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만일 자신들의 요구(대개는 부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 하여 제재를 가하게 되면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치 이상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리들은 물론 국왕조차도 존경할망정 억압하지 않았다.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사회에도 법은 있었다. 법의 준수와 적용은 황제라 해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종종 사극 같은 것을 보면 초법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왕이 등장하는 예가 있는데. 그것은 드라마이기 때문에 그렇게 그려지고 있는 것일 뿐 불법을 저지르는 왕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조를 떠받치는 기둥이 바로 이 법이었기 때문이다. 왕이 법을 무시하게 되면 그것은 곧 왕조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 돼 왕조의 관계자들 쪽에서 용납하지 않았다. 정난(靖難)이 일어난 것이다. 왕이 저지르는 불법이 자기들의 사익 추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공’이 건실해야 자신들도 가져갈 수 있는 몫(‘私’)이 있기 때문이다. 법 곧 ‘공’의 준수는 왕이든 신하이든 모두가 지켜야 할 천하의 보편 원칙이었다.

혼란은 정해진 규칙(“禮” 곧 분배 정의)이 지켜지지 않을 때 발생한다. 그런 일들은 대개 왕이 국정 운영을 태만히 하여 관리들에 대한 통제가 미흡하거나 부패한 관리(外朝)들을 감찰하기 위해 영입한 관리(內朝)들이 백성들의 몫을 불법적으로 강탈할 때 일어난다. 이때 백성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심한 경우 왕조가 몰락하기도 한다.

문제는 왕조의 몰락이 아니라 국가 곧 공동체의 몰락이다. 왕조가 몰락할 경우 새로운 왕조로 대체하면 그만이지만 공동체의 몰락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나라들이 나타났다 사라져 간 모습을 본다. 동아시아만 해도 나라를 이룬 민족은 한족과 몽골족, 일본족, 그리고 우리 민족뿐이다. 만주족은 청이라는 대제국을 이루며 천하를 지배했지만 오늘날 그들이 이룬 나라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와 문자조차도 찾을 수 없는 지경이다.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면 여간해서는 회복되지 않는다. 회복된다 해도 수 세대를 경과한 뒤에야 겨우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처사들의 권능은 이때 발휘된다. 처사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을 뿐 통치에 필요한 지식과 덕목을 모두 갖춘 사람들이다. 유학의 교양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출사해도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모두 것이 갖추어진 사람들이다. 보통 ‘처사’라고 하면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음풍농월(吟風弄月)’하고 ‘북창청풍(北窓淸風)’하며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지만 이들은 처사가 아니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일체 간여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 ‘은일지사(隱逸之士)’도 처사가 아니다. 그들은 처사의 적이요 민생의 적 일뿐이다.

처사는 유교적 교양의 세례를 받아 몸과 마음이 유학의 정신으로 꽉 차 있고 유학의 정신과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정치계의 번거로움과 세상의 어수선함을 싫어해서 초야에 묻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조건만 갖춰지면 언제든 출사해서 뜻을 펼칠 수 있는 이를테면 ‘관료 상비군’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다.

유학의 목표는 ‘인간다운 삶의 실현’이다.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를 인간다운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이때 필요한 덕목이 ‘충(忠)’이다. 그런데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나 혼자서는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없다. 이에 인간다움의 실현에 뜻을 둔 자는 나의 인간다움을 이루려는 노력과 함께 남의 인간다움도 이뤄주려고 하는데 그것이 ‘서(恕)’의 도덕이다. 이런 경우 정치는 매우 중요하다. 정치보다 그것을 더 잘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맹자는 사(士)의 직업을 묻는 제자의 질문에 ‘사는 뜻을 키워 출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뜻을 키운다’고 할 때의 ‘뜻’이 ‘인간다움의 구현’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출사는 바로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학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유학의 교양 습득을 매우 강조하며 이를 ‘사람됨’을 분별하는 기준으로 삼고, 이런 도덕을 완성한 사람이나 이런 도덕의 취득에 정진하는 사람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존경(‘師表’)했던 것이다.

처사들이 보기에 국가의 기층은 민생(民生)이다. 그리고 이 민생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덕이 있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존경하며, 어른은 어린 이에게 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어린 이는 어른의 경험에서 인생의 경륜을 배워야 한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돕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하며 붕우 간에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 형제자매 간에는 다툼이 없어야 하며 화목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해야 한다. 정치에 나아간 자는 하늘이 만 백성을 낸 뜻을 헤아려 인정(仁政)을 펼쳐야 하며(君子上達), 처사로 살아가는 자는 백성의 생업을 안정시켜 국가의 재정을 돈실하게 해 나라를 아래로부터 굳건하게 해야 한다(小人下達). ‘상달’이든 ‘하달’이든 거기에는 모두 인간의 정이 녹아 있는 것이다. 출사와 처사에는 상하의 구분이나 존비(尊卑)의 차별이 없다. 그것은 단지 세(勢)가 만들어 낸 편의상의 구분일 뿐이다.

처사들은 자신의 이익보다 민생의 이익에 전념했다. 유학의 이상은 ‘충서’에 있기 때문이다. 출사한 자들 앞에는 이른바 ‘세(勢)’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어찌됐든 자신을 등용해 준 왕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의무 같은 것이 있었지만, 처사들에게는 그런 의무나 규정 같은 것이 애초부터 있지 않았다. ‘충’은 오로지 국가의 안위 곧 백성들의 삶을 보호하는 데 쓰인 것이다. 유학의 도를 실현하는 데는 처사들의 삶이 오히려 홀가분했던 것이다.

전제군주 국가에서는 왕과 국가가 등치되고, 왕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등치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안다. 국가와 군주는 다르다는 것을. 그러나 왕에게 등용(出仕)된 자들은 그걸 알면서도 왕의 이익 추구에 봉사해야 한다. 그것이 도리다. 그것이 내키지 않으면 정치계에서 물러나야 한다. 하지만 처사에게는 그래야 할 의무나 도덕 같은 것이 없다. 군왕을 존경하는 것은 단지 그가 하늘의 명을 받아 인간다운 삶을 이루는 데 필요한 정치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백성이 있다면 그들을 돌볼 왕(정부)의 존재는 필연적이고 그런 차원에서 왕에 대해 공경심을 표시할 뿐이다. 다만 그것은 왕이 백성들의 삶, 곧 인간다운 삶을 보호하려고 할 때뿐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충성을 바쳐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출사한 관리들에게 요구된 ‘충’의 덕목은 군주(국가와 동일시 된)를 향해 있지만 처사들이 실현한 ‘충’의 덕목은 오로지 국가(민생)을 향해 있는 것이다. ‘공사(公私)’에 대한 견해도 달랐다. 출사한 관료들에게는 ‘공사’의 기준이 왕조의 이익과 결부되어 있지만 처사들에게는 민생의 이해와 관련되어 있었다. 공자가 말한 ‘충서’의 도덕에 철저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출사한 관리들은 나라가 평화로울 때는 군주와 더불어 복록(福祿)을 누리지만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모욕을 당하거나 죽임에 내몰린다. 청사(靑史)에 그 이름이 기록돼 자자손손 전해지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도 한다. 그러나 처사들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평소에는 유학의 교양을 연마하며 공동체의 질서를 바로잡는 데 주력하고, 국정이 문란할 때에는 가산(家山)을 털어 민생을 돌보며 어떠한 경우에도 민생이 피폐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한다. 민생의 안정이 인간다운 삶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는 평소에 베푼 감화(感化)를 바탕으로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온 몸을 던진다. 그것이 민생을 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름은 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며 구전(口傳)으로 남아 민간에 전설로 전해질 뿐이다. 처사들은 공을 이룬 뒤 그에 머물지 않는다. 선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사한 사람들은 그것을 선택할 만한 여유나 자유조차 없다. 왕이 주는 것은 무조건 받아야 한다. 그게 의무요 ‘충’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욕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처사는 이런 것을 구차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출사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자기만의 도를 실현하며 살았던 것이다. 온갖 부덕한 무리들이 국정을 농단했던 시절,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일념으로 서부면에 입향한 평택 임씨 가문의 부해정(浮海亭)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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