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토피아를 갈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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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토피아를 갈망하는가?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1.10.27 14:4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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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구(청운대 교수)

16세기 초 영국의 토마스 모어가 처음으로 ‘유토피아’라는 책을 쓴 이래, 이 말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 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불평등과 차별, 억압이 없는 ‘유토피아’의 건설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현실이 어렵고 힘들 때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곳은 가까이 있는 듯 하면서도 다가서면 신기루처럼 다시 저 멀리 달아나는 ‘욕망의 대상’, 즉 라캉이 이야기하는 “오브제 프띠 아 (object a)”라 할 수 있다.

런던, 마드리드, 뉴욕, 서울 등 이제는 세계 각지에서 ‘분노하라’, ‘점령하라’ 요구가 거세게 분출되고 있다. 그동안 경제난으로 압박받던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들고, 이상사회와 현실사회의 모순을 가장 첨예하게 경험한 ‘주변화’된 타자(他者)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일시적이며, 현실적으로 그들을 만족시켜 줄 만한 방안이 없다고 경시할 만한 일이 아니다.
이들이 피켓을 들고 월가를 점령하는 동인(動因)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이들을 광장으로 이끌게 하는 힘은 ‘유토피아’로 향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계급투쟁의 역사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로 이루어진 혁명적인 변화는 독재이외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으며, 사회주의 국가들은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으니 ‘월가를 점령하라’와 같은 운동도 잠시 지나가는 바람이다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소수의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다수의 경제적 불평등이 계속된다면, 헤겔의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언제라도 새로운 여명(黎明)을 알리는 ‘닭’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월가를 점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상위 1%가 부를 독점하여 하위 99%에게 경제적 혜택이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울림이다. 금융파생상품을 만들어 경제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고도 월가의 CEO들은 오히려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아가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를 관리해 왔던 상위 1%가 능력을 상실하자 금융자본주의의 장송곡(葬送曲)이 들리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적 자금을 천문학적으로 수혈 받은 금융기관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보너스 잔치를 벌이고 있다면 누가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겠는가? 꼬박 꼬박 월급에서 혈세를 바치고 있는데 이 돈이 이들의 돈 잔치에 사용된다면 분개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경제체제는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기여하는 방향으로 틀을 잡아가야 한다.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절반은 취업을 하지도 못하고, 취업을 한다 해도 절반은 100만원 안팎의 적은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자리뿐이다. 침체된 경제체제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니 정치권은 대학생들에게 눈높이를 낮춰 생산직에라도 취업해야 한다고 일갈(一喝)한다. 학부모와 학생들은 생산직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청년백수를 지낸다 하더라도 생산직에 갈 의향이 없다. 이렇다보니 교육과학기술부는 대학을 평가할 때 취업률이 나쁜 대학은 퇴출대상 대학으로 낙인찍고 대학의 목을 비틀기 시작한다. 청년백수가 많아지면 나라가 혼란해진다. 중동의 재스민 혁명이나, 미국의 월가, 런던의 시위 등도 그 배경을 살펴보면 청년실업의 문제에 있다. 청년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 대학에만 책임을 전가할 것이 아니라 정당, 국가가 나서서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지자체들도 그 지역의 대학생들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정당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대변해 왔다. 제도가 개인보다는 더 믿을 만한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메시아처럼 나타나 목청을 돋구어도 일회적이었으며, 신뢰성은 역사적으로 크지 않았다. 그러나 정당이 그 역할을 상실하고 ‘그들만의 리그’로 정쟁만 일삼는다면 국민은 선거를 통해 정치꾼들을 심판을 할 것이며 그것마저도 실현될 수 없다면 다수의 시선은 ‘유토피아’를 향하게 될 것이다. 유토피아를 향하는 시선의 근본은 현실에 대한 총체적 거부이며 급진적이다라는 저명한 영국의 사회주의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즉 <유토피아>로 이끄는 힘은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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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순 2011-11-05 15:21:01
어쩜,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병패를 어디서 어떻게 변화를 시도해야 할 지에 대한 막연함으로 오는 불확실성이 우리를 현실성이 없는 미래로 꿈꾸게 하고 있는지는 아닌지 반문해봅니다.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꿈꾼다는 자체가 현실의 저 밑바닥 고통을 감내하기에 벌써 우리는 심리적. 육체적으로 너무나 병약한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시점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현 사회를 돌아볼 수 있는 글 감사합니다.

지정순 2011-11-05 15:08:35
지식기반사회에서 드러나는 병패적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현장에서 현실성이 없는 죽은 지식과 실천.실행력이 없는 통계수치로 말하는 정치인들의 입은 이제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증명되는 단면이기도 하지만 변화를 원하지만 그렇게 변화하려면 개개인들도 변화 아닌 변혁을 보여야 하는데 무기력한 우울증에 빠진 현대사회인들도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때문에 꿈꾸는 것은 아닐까요? 이상.유토피아로~~~

지정순 2011-11-05 14:50:25
칼럼 잘 읽었습니다. 유토피아로 이끄는 힘은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한다고 하신 것 참 많이 동감하는 부분입니다. 의지가 약한 인간들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메세제이기도 하구요. 현실.현재가 힘들때 우리가 좋았던 그 옛날을 회상하는 것과 같은 논리일 것 같구요. 지금처럼 전 세계적으로 힘든 경제상황.환경속에서는 더더욱 이상적이고 감성적인 것으로 방향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스템의 함정에 매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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