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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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지나가리라!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03.05 09: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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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확진 환자수가 4000명을 훌쩍 넘어섰고, 대구에서는 더 이상 확진 자를 병원이 수용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국란(國亂)에 가깝다. 타 지역으로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끔찍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이러스와 같은 병원균을 방역하는 방법과 시기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 여기에 정치적으로 잡다한 생각이 들어가면 방역의 적기(適期)를 놓치게 되고 처참한 상황을 맞게 된다. 작금의 우리 현실은 이런 것을 소홀히 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전염병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 동서양 어느 곳에서나 전염병이 돌면 지금처럼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미약했다. 우리나라 처용무(處容舞)도 통일신라시대의 역병을 배경으로 한 춤이라고 할 때 전염병의 오랜 역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 가장 처참한 전염병의 예는 페스트다. 페스트가 중국에서 발생해 흑해 연안을 거쳐 마르세이유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유럽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중세 유럽은 가톨릭을 믿는 종교사회였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종교지도자와 일부 사람들은 신앙심 부족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내리는 징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죄가 많다면서 채찍으로 자학(自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자들은 교회에 유명화가의 성화(聖畵)를 받쳐 전염병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했다. 이러한 그림을 바치는 행위는 오히려 유럽 르네상스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나님의 징벌을 타자로부터 찾아내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희생양을 만들어 냈다. 돈 잘 벌고 똑똑한 유태인이 미웠던 사람들은 그들이 우물을 오염시켜 페스트가 퍼지게 했다면서 그들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전염병의 현장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아 알베르트 카뮈는 페스트1947년 출간했다. 이 소설은 페스트가 창궐해 봉쇄된 알제리의 아랑이라는 조그만 해안도시에서 외부와 연결이 단절된 채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페스트로 이웃이 죽어나가는데도 이를 이용해 큰돈을 벌어보려는 코타르와 같은 인간이 있는가하면, 의사로서 페스트 발생을 시 당국에 알리고 최선을 다해 환자를 치료하는 리외, 파리에서 이곳에 와있던 신문기자 앙베르는 나는 이곳과 관계없다며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애를 쓴다. 파늘루라는 신부는 이렇게 페스트가 창궐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징벌을 내리는 것이라며, 인간들이 회개해야 한다고 설교한다. 그러나 종교는 죽음에 대하여 불안, 초조, 공포를 갖는 인간에게 부활과 영생을 약속한다. 병을 고치고 징벌을 내려 신비함을 보여주는 것이 종교의 본질은 아니다.

작금에 창궐하는 코로나19가 어떻게 확산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이것에 잘 대처하는 방법은 개인위생 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타인과의 접촉을 가급적 피하는 일이다. 소설에서 그랑, 리외, 앙베르 등도 보건대에 참여해 페스트 소멸을 위해 헌신하지만, 수익이 사라진 코타르는 페스트가 물러나자 시민들에게 총질을 하며 난동을 부린다. 마스크를 매점매석하여 돈을 벌려는 사람이 있다면 코타르와 다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이런 모습의 극한 상황은 눈먼 자들의 도시일 것이다.

오랑을 간절히 벗어나고자 했던 랑베르는 페스트가 창궐하는 그곳을 떠나지 못하면서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라는 말을 남긴다. 카뮈가 국란을 겪는 곳에 남기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어려움) 또한 지나가리라!(Hoc quoque transibit!.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어과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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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구 2020-03-07 14:48:41
잘 읽었습니다.
공명지조라는 사자성어가 작년 우리나라에 교수들이 뽑은 1위인데요.결국은 공멸 한다는것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 마스크를 매점매석하는것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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