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운세 국가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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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운세 국가의 운명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05.1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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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의학을 공부할 게 아니라 관리가 될 준비나 하시오. 과거 시험 초시에는 14등, 그 다음에는 71등, 마지막 시험에는 9등을 해 출사할 팔자요.”
명나라 초기의 학자였던 원료범(1533~1606)은 19세 때 운명학의 대가 공선생에게 이 말을 듣고 과거시험 준비 끝에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 합격의 등수까지 정확히 맞고 보니, 그는 매사를 답답하게 생각하고 더 이상 뭘 구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운명론자가 됐다.
“당신은 말년에 사천성의 대윤으로 부임해 3년 반이 지나면 사임하고 고향 돌아와 53세 되는 해 8월 14일 축시에 거실에서 죽을거요. 안타깝게도 자식은 없소.”

그런데 37세가 되던 1569년 원료범은 우연히 남경 서하산에 머무르던 운곡선사를 만나면서 인생은 바꿀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운곡선사의 가르침의 핵심은 “당장에 생각과 습관을 바꿔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라”였다. 그래서 굶주린 자에게 음식 보시도 하고 산목숨을 사들여 놓아주기 같은 선행 3000가지를 1583년에 완료하니 팔자에 없던 아들도 낳게 됐다. 현령이 된 뒤에는 1만가지 공덕 쌓기에 도전했는데 왠종일 관청에서 바쁘게 일하다보니 공덕 쌓기가 힘들어 고심하던 중 꿈에서 한 신선을 만나 묘책을 얻게 된다.

즉, 백성들의 세금을 조금만 낮춰 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관상쟁이가 예언했던 나이보다 21세가 많은 74세까지 살았다.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에 실려있는 얘기다. 원료범이 자기의 체험을 정리한 ‘요범사훈’에는 이런 얘기도 있다. 복건성 양영이라는 사람은 집안 대대로 뱃사공 일을 했는데 한 번은 심한 물난리로 강물이 넘쳐 제방이 무너지고 물에 빠져죽은 사람들이 하류로 떠내려 왔다. 다른 배의 주인들은 모두 떠내려오는 재물을 건지기에 힘썼는데, 양영의 증조부와 조부는 사람을 구하는데 만 힘쓰니 사람들이 그들 부자를 비웃었다. 그러나 양영이 태어났을 때에 이르자 집안이 점점 부유해졌다. 하루는 어떤 도사가 “자손들이 부귀영달을 누릴 것이니 저기 저곳에 무덤을 쓰시오” 하더란다. 그리하여 그의 후손들이 줄줄이 벼슬을 하였다. 풍수얘기가 나오고 보니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직을 접고 우리나라(자생) 풍수를 연구하고 있는 최창조가 쓴 ‘한국 풍수 인물사-도선과 무학의 계보’가 연상된다. 

그의 지론인즉 한국풍수의 비조 도선은 결코 중국에 가서 풍수를 배운 것이 아니요. 지리산의 어느 야인에게 풍수를 배웠고, 사람들에게 묫자리 잘 써서 잘먹고 잘 살라는 것을 가르친게 아니고, 우리강산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어 보완해주는 이른바 비보 풍수의 길을 개척했다는 또 따른 견해이다. 이는 내조국 내 강토에 대한 참 사랑이니. 또 따른 의미의 적선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운세를 바꾸는 길은 많다. 첫째가 적선이고, 그 밖에도 명상이나 요가 같은 정신수양, 자신의 운명을 좀 더 낫게 이끌려는 여러가지 노력, 특정 소수보다는 다수를 생각하는 삶 또한 팔자 고치기의 훌륭한 길이다.

엊그제 집권 3년 후를 맞은 대통령의 담화 속에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경험삼아 세계를 선도해나가겠다는 굳은 의지가 내포돼 있었다. 1990년대 초인가? 육관도사 손석우 옹이 “하늘의 오경명성이 우리나라를 비추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대한민국이 세계를 주도해날 것이다”라고 예언한 바도 있어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전 세계의 대다수가 아직 대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 모두 [주역]64괘 가운데 15번째가 되는 겸손할’겸, 괘를 가슴에 새겨봄이 어떨지 생각한다. 괘사나 효사 속에 나쁜 점이 단 하나도 없는 유일한 괘가 ‘겸, 괘이니 그 아니 좋은가!  

이원기<청운대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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