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수당고택(禮山, 修堂古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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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수당고택(禮山, 修堂古宅)에서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07.0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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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모든 과거 사건을 의미한다고 랑케(Lanke, 1795-1886)는 정의한다. 그러나, 카(E.H Carr, 1892-1982)는 역사적 사실들은 역사가가 그것을 불러낼 때만 말을 한다며 역사를 생명체로 여긴다. 과거의 흔적을 불러내어 그것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자는 슬픈 역사를 반복할 운명에 처하기 쉽다. 그래서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적용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나라들이 수명을 달리하며 명멸(明滅)했다. 

수백 년의 역사가 내려오는 수당 고택의 이야기는 조선시대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예산군 대술면에 있는 독립운동가 수당 이남규 선생에 관한 이야기 속에는 6·25 함남 전투에 참전했던 그의 증손자 이장원 중위까지 4대에 걸쳐 국립현충원에 4대가 안장돼 있다는 슬픈 가족사도 담겨 있다. 수당은 공주 감옥에 투옥됐다가 그의 아들과 함께 1907년 일본군에 의해 피살됐다. 그의 선대(先代)는 아계(鵝溪) 이산해 선생이다. 이산해는 선조 때 영의정까지 지냈으며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선조 때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갈라지는 당파의 영수(領袖)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합당한 평가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있다.

당쟁의 결과로 내려오는 평가는 객관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조를 중심으로 한 대신들 간의 암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나라의 허약함을 드러나게 했고 백성들을 피폐한 삶으로 내몰았다. 두 전란동안 일본으로 많은 도자기공들이 끌려갔고, 그 중 아리타현에서 도자기 공으로 입지를 세운 이삼평은 일본 도자기의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다. 아리타 현에서는 지금도 그를 기리는 축제를 연다. 

백자를 만드는 그의 고급 기술은 일본에 전해졌고, 네덜란드와 교류를 시작했던 일본은 네덜란드로 도자기를 수출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이삼평의 도자기 굽는 기술은 서양의 도자기 기술을 업그레이드 하는 계기가 됐고, 일본은 벌어들인 돈으로 개화를 앞당기며 유럽의 군함을 사들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들의 기술이 나라를 빼앗기게 하는 모멘텀으로 작용한 셈이다. 

한편, 임진왜란이 발발(勃發)하기 100년 전에 에스파냐에서는 콜럼버스가 금과 향료를 찾아 4차례에 걸쳐 대 항해를 시작했다.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 하여 이슬람 세력을 그라나다에서 몰아내고 다시 가톨릭 국가를 세웠다. 이곳에 살던 유대인들은 모두 떠나야만 했고 대다수는 지금의 네덜란드 암스텔담에 정착했다. 그 이후, 유대인이 이곳을 떠나자 에스파냐는 사회, 경제의 활기를 잃게 되었고 암스텔담은 북유럽의 상업중심지로 발돋움한다. 유대인들의 그 사회역할과 환란 극복의 예를 볼 수 있는 사건이다. 

15-16세기 유럽에서는 지구가 둥글다는 신념하에 배를 타고 멀리 나가는 모험을 했지만, 중국과 우리나라는 바다를 멀리하고 육지로 눈길을 돌렸다. 그 결과 중국은 아편전쟁을 피할 수 없었고, 우리나라는 쇄국정책을 유지하다 일본에 합병되고 말았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그랬던가? 현재 세계무역 물동량의 90%가 배를 통해 이동된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장보고 이후 바다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6월 25일, 잠시 들른 수당 고택에서 조선의 아픈 역사위에 유럽 역사가 오버랩 됐다. 수당 고택에서 아계 선생에 관한 자료를 보다가 500년 전 유럽의 시·공간까지 ‘플래시백’(flashback)해 보았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금후에도 인간 본성으로 인해, 다른 상황에서도 서로 닮은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남겨 놓았다.

 

김상구<청운대학교 영어과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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