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뜨거운 삶
상태바
인생, 뜨거운 삶
  • 한학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3.18 08:4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궁핍에 시달리다 보면 불현듯 자기성찰의 기회가 온다. 비유가 절절한가 싶지만 ‘라면 소녀’ 임춘애, ‘4전 5기’ 홍수환 등이 떠오른다. 

끝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절대로 비관적인 태도가 아니다. 한정된 시간을 산다는 강한 자의식이 인간을 훨씬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음 둘 곳 없어서 괴로웠던 시기의 터널을 통과하고 나자 황량하고 격정적인 세계가 또 있더라도 말이다. 

지금을 소중하게 가꾸다보면 내가 불가능의 늪에 두고 겁을 내던 일이 그다지 버겁지 않게 다가온다. 삶에서 불행마저도 행복으로 역전시키는 데 삶의 극적인 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과정에서 삶은 결코 무료하지 않을 거다. 인생은 수많은 조각 퍼즐을 맞춰나가는 과정이다. 멋있는 인생은 생각하는 그것이 되도록 많이 실현되는 것이다.

성공은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끝없이 가는 데 있다. 한계인지 아닌지는 한계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 오늘 주어진 생의 의미를 만끽하는 것, 그런 마음의 태도가 목표하는 삶을 가능케 한다. 인생을 살다보면 마음이 제일 움직이는 순간이 온다. 한 번 다른 길을 가보고 싶을 때, 타성에서 멀리 도망치고 싶을 때, 죽을 때 덜 후회하는 삶이 뭘까 고뇌에 찬 모습을 만날 때가 있는 것이다. 

인생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의 여정이다. 거듭 방황하고 모험하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패배를 맛본다 해도 가치 있는 패배라면 되레 상승효과로 나타난다. 패배자에게 끌리는 이유다. 어떻게 하면 그 목표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다. 치열해야만 삶의 심연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곳에 의미 있는 가치가 사는 것이다. 

인생이 꼬이는 이유는 질투와 열등감 탓일 때가 태반이다. 삶의 목표를 위해 열심히 매진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는 자신을 다독거려야 하는 이유다. 몰두하되 집착하지 않는 삶이어야 한다. 삶이 인생의 백지 위에 쓰이는 과정에서 겪는 수고를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 지레 겁내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늪에 빠진다. 인생이라는 드라마는 수고와 환희의 양면으로 짜인 두 갈래 길이다. 

로버트 프로스트도 그의 시에서 고민을 여실히 드러냈다. “먼 훗날 나는 어디선가 한숨지으며 말하겠지 언젠가 숲에서 두 갈래 길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잘 가지 않은 길을 갔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게 달라졌다고…” 진퇴양난의 난감한 상황이라도 치열하게 수고하면 궁극에는 결실이 맺힌다. 내가 있기에 세상도 있다는 자존감과 동기부여가 귀중한 오늘을 만드는 열정의 밀알로 쓰인다. 시인 김남조는 “삶이란 놀라운 일이다. 간절하기도 심각하기도 하다. 또한 평생 다니는 학교이며, 단 한 번 주어지는 절대 기회다”라고 일갈했다.

인생에서 개인차가 있겠으나 가능하다면 재물을, 명예를 멀리하면 행복한 인생을 살다갈 수 있다. 최소한 품격 있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속담이 있듯이 삶에서 잘 보는 것은 자세히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것이다. 분수에 맞게 자신이 지닌 것, 아직 본인에게 주어진 것을 잘 꿰뚫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다. ‘나 중심의 삶’을 ‘우리 중심’으로 살아내는 것, 그 길목에는 희생과 배려가 향기를 퍼뜨린다. 계획한 바를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은 늘 아름답다. 준비하는 한, 머리를 치켜들고 희망의 실낱을 붙잡고 있는 한 삶은 긍정이다. 인생은 ‘한방’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참된 인생은 ‘무엇인가’를 계속 이뤄가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높이 올라가는 삶보다 깊이 있는 삶에 더 큰 울림이 있다.

인생에서는 무수히 많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했느냐, 대처하느냐’에서 명운이 갈린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고, 불가능한 것을 이뤄낼 수 있는 속성은 간절함에 있다. 게다가 인생길 위에 마음 통하는 동반자를 만나는 행운도 한몫 거든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이다. 또 다른 동반자, 고통받고 슬퍼하는 이웃에게 마음 한구석 열어주는 여유가 사회를 행복하게 하는 소중한 밀알일 테다. 예수가 말하듯 “남의 눈의 티를 보지 말고 네 눈 속의 들보를 보아라”라는 말을 실천하며, 삶을 살아낸다면 웬만큼은 살다가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각박한 정글 숲의 도시에서 무엇으로 살겠는가. “순수의 시대는 갔다. 이제는 하이브리드시대다. 전공의 벽은 허물어진지 오래고, 영역을 넘나들고 경계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하이브리드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서 지식조차 이제는 새로운 ‘하이브리드’를 요구하고 있다”라고 《예술, 인문학과 통하다》에서는 갈파하고 있다. 

우리 삶에서 제기되는 문제, 우리가 부딪히는 현실 자체가 복합적이고 다양하므로 그렇다. 이 험한 세상에 그저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면서 사는 게 얼마나 큰 바람인가, 욕망인가 거듭 자성하게 하는 세상 경향이다. 그런데도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 아름다운 계절이 우리를 너그럽게 한다. 

 

한학수 <청운대 방송영화영상학과 교수·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박현후 2021-03-19 16:35:52
요즘 드는생각이 궁핍은 "일시적인 상태" 이고 가난은 "마음 가짐" 이라고 생각합니다.
궁핍과 가난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는 가난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무언가에 "궁핍한 상태를 받아들이고" "어떻게하면 벗어날수있을까", "내가 할수있는게 무엇일까" 끊임없이 생각하며 궁핍을 벗어나려 "노력"한다 생각합니다.
가난한 마음가짐을 가진자는 "그렇게 까지해야돼?, 그럴필요없지, 나는 괜찮다" 하며 즉 자기합리화와 불만족스러운 상황에 노력하기싫어 외부요인에 눈을돌리고 스스로를 생각에 가둬버리는것이 아닌가.
외면하고 노력하지 않은 가난한자의 거울 앞에는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참한 현실만이 남을 뿐임을 망가진 신체로 느꼈습니다. 스스로가 가난함을 깨닫는순간이 첫 걸음이었음을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