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청산과 정의로운 나라
상태바
친일청산과 정의로운 나라
  • 이상권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4.08 08: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이 노래만 들려도 가슴이 찡하며 눈물이 고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유관순 누나가 지난 2019년 삼일절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아서 1962년에 받은 ‘건국훈장 독립장’에 이어 훈장을 두 번이나 받았다. 서훈자가 30명에 불과하던 최고 중의 최고 영예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으신 선열이 31명으로 늘어난 것을, 나는 축하하고 싶지 않다.

1946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사로 초등학교 국어교과서를 제작했던 박창해가 이화학당 학생들의 3·1만세운동 자료를 보고 교과서에 실을 만한 인물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이화여고를 찾아갔으나 “200여 명의 참가자 중에서 누굴 내세워야 할지 모르겠다”는 답만 얻고 돌아왔는데, 마침 같이 편수사로 근무하던 유관순의 조카 유제한이 찾아와서 고모 유관순을 추천해 교과서에 게재됨으로써 유관순이 처음으로 대중에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1947년 2월에는 소설가 박계주가 ‘경향신문’에 ‘순국의 처녀’를 기고했고, 그해 9월에는 이화여고 교장 신봉조와 박인덕 등이 자신들의 친일행각을 희석시킬 절호의 기회로 삼고 김구 주석 등을 앞세워 유관순기념사업회를 구성했다. 1948년에는 친일 소설가이던 전영택이 최초의 유관순 전기인 ‘순국처녀 유관순전’을 펴내서 유관순을 ‘조선을 구한 잔 다르크’로 표현하고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인 존재로 승격시켰다. 

유관순의 이름이 유명해진 배경에는 독립운동을 찬양함으로써 자신들의 친일행각을 희석시키려는 신봉조, 박인덕, 전영택 등 친일파들의 상징조작이 있었던 것이다.

일제 경찰의 통계에 따르면 3개월간의 만세운동 진압과정에서 사망자가 7509명, 부상자가 1만 5961명, 구금된 사람이 4만 6948명이었다고 한다. 사망자 중에는 유관순의 부모님도 포함되지만 4등급 애국장을 서훈받았을 뿐인데, 구금자 중의 1인에 불과했던 유관순은 3등급 독립장을 받은 것이다. 3·1운동을 주된 공적으로 1등급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은 분은 유관순 외에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세 분뿐인데, 유관순은 이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이종일은 다른 공적도 많지만 3·1독립선언 33인 중의 1인으로서 독립선언문 3만 5000장을 인쇄해 배포하고, 맨 먼저 조선총독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다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일경에 체포됐어도 1등급 대한민국장이 아닌 2등급 대통령장으로 서훈됐고,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실제 선봉장이자 지휘자였던 조인원도 5등급인 애족장을 추서받았을 뿐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유관순이 1962년에 3등급 독립장을 추서받는 데에 친일파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지난해 봄, 내포신도시 홍예공원에 다섯 분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독립운동가의 거리’라는 안내판에는 ‘충남의 대표 독립운동가 5인의 조형물을 건립하는바, 태극에 유관순을 배치하고 건·곤·감·리의 4괘 자리에 한용운(홍성), 김좌진(홍성), 윤봉길(예산), 이동녕(천안)을 배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네 분은 귀퉁이 자리일망정 작은 동상이라도 세워져 있지만, 충남 출신으로서 1등급 대한민국장을 서훈받은 임병직은 물론이고, 이동녕과 같은 2등급 대통령장을 서훈받은 이상재, 이종일, 민종식 등의 동상은 없다. 그 대신 이분들은 엄청 거대한 유관순 동상의 발 받침대를 빙 돌아 이름이 새겨진 채 유관순을 떠받들고 있는 역할만 하고 있다.

이런 기이한 형국에는 정치인들의 입김이 작용했다. 박완주 국회의원은 ‘유관순 서훈격상 특별법’을 발의한 바 있었고, 양승조 충남지사는 ‘유관순 열사 서훈 상향 100만인 서명 운동’을 추진했었으며, 김지철 충남교육감은 ‘이동녕 서훈 격상 운동’을 벌이고 있다. 천지조화와 우주만물의 중심인 태극에 유관순을 세워놓고 위대한 충절의 영웅들로 하여금 떠받들도록 만들었는데, 이를 추진한 분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터전에서 그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고 더 출세해보려는 욕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유관순 열사를 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애초에 그 상징성을 조작하거나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던 무리들이 친일파들이었음을 모르고, 그들의 뒤를 좆아 정치적 이득을 도모하는 세력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유관순은 사후에 더 널리 알려져서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했다는 새로운 공적”이 있어서 1등급 대한민국장을 추가했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생전의 공적이 새로이 알려진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새로이 세운 공적도 있단 말인가? 죽은 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져서 국위를 선양한 공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신봉조 등 친일파들이 세운 공적이므로 그들에게 서훈할 일이지 유관순에게 서훈할 일은 아니다. 

유관순 열사의 영혼이 이 강토를 내려보고 계실 터인데, 친일행적을 희석시킬 목적으로 자신을 욕되게 한 자들과 정치적 목적으로 사후 공적까지 만들어 자신의 서훈을 격상시켜준 정치인들을 어떻게 응징하실지 모르겠다.

 

이상권 <변호사·전 국회의원·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