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태극기와 3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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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태극기와 3만 원
  • 황희재 기자
  • 승인 2021.06.23 0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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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서울로 이사를 갔다. 서울사람들은 대전사람이라고 불렀다. 스무 살에 돌아온 대전에서는 서울사람이라고 불렸다. 

“어디 출신이에요?” “어디 분이세요?”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건 아직까지 어렵기만 하다. 하루는 대전이라고, 다른 하루는 서울이라고 답을 한다. 어떤 답을 하든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금세 드러난다.

2004년 겨울, 대전에서 서울로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가봤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소개시간이 얼마나 긴장되는 지 공감할 것이다. 30여 명 정도 되는 또래 아이들 앞에서면 누군지 궁금하다는 표정부터, 관심 없다는 듯 딴청을 피우는 모습까지 그 모든 광경이 공포로 다가온다. 소란스럽지는 않다. 그래서 더 긴장되는 순간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전에서 전학 온 황희재라고 합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며 또래에게 존댓말을 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날, 자기소개시간에 눈에 띄는 아이 하나가 있었다. 딴청 피우는 아이들 사이에서 또렷한 눈동자로 전학생을 바라보던 열두 살 남자아이.

서울에서 가장 먼저 사귀게 된 친구였다. 녀석은 며칠 후 하굣길에서 자신도 전학생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친구네 가족은 2003년 한국을 강타한 태풍 ‘매미’ 때문에 고향인 마산에서 운영하던 가게를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고 했다. 친구의 부모님이 서울에서 연 가게는 횟집이었다. 그래서인지 친구의 옷에선 늘 생선냄새가 났다. 친구가 절실했던 나는 생선냄새가 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매일 등하굣길을 함께한 둘은 그렇게 한참을 이방인으로 지냈다.

취재를 하다보면 여러 가지 소식을 접하고 다양한 분야의 사건들에 대해 알게 된다. 지역신문사에 근무하다보니 마을주민들과 대화할 기회도 종종 있었다. 얼마 전 한 마을주민과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하던 중 안타까운 소식 하나를 들었다. 타지에서 이사 온 그의 가족에게 마을 주민들이 마을발전기금 명목으로 큰돈을 요구했다는 이야기였다. 

농촌지역사회의 실정에 대해 잘 몰랐던 나는 특종인가 싶어 인터넷 검색 창에 ‘마을회관 텃세’라고 입력해봤다.

특종일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인터넷에는 <“심한 텃세에 살기 힘들어, 왜 귀농 했는지 후회막심”>, <농촌의 텃세… “큰맘 먹고 귀농했더니 마을발전기금 내라”>, <귀농인 향한 텃세, ‘후한 인심’ 옛말, 마을기금 요구에 이방인 취급’> 등 전국적으로 수많은 관련 기사들이 올라와 있었다.

홍성군을 포함한 전국 각지의 지자체에서는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 전입신고를 하면 증정품을 주거나 지원금을 주는 등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귀농·귀촌을 장려하고 다문화가정에 대한 지원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런 정책들은 지역균형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이주민과 이방인에 대한 지원정책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 

곳곳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관련정책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이방인에 대한 차가운 시선은 여전히 우리사회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앙정부와 지자체, 기관, 민간단체 등에서 아무리 지원을 해봐야 이주민들이 지역사회에 어우러지지 못한 채 인구수만 부풀려진다면 그 돈과 노력이 다 무슨 소용일까. 

두 달 전, 홍성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전입신고를 했다. 그리고 태극기와 전통시장상품권 3만 원을 받아가라는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며칠 후, 행정복지센터 창구 앞에서 직원에게 그 문자를 보여줬다. 창구너머에 앉아있던 직원은 멀뚱히 쳐다보더니 “잠시만요”라는 말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1분쯤 흘렀을까 태극기와 3만 원이 내손에 쥐어졌다. 나는 상품권 3만 원이 들어있는 봉투를 가방에 집어넣고 태극기를 차에 실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이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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