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옵티콘(Panopticon)과 빅 브라더 그리고 수술실 C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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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옵티콘(Panopticon)과 빅 브라더 그리고 수술실 CCTV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7.01 0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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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수많은 CCTV가 설치돼 있다. 방범과 안전을 위해 건물 입구, 주택의 담장, 각종 관공서와 공항, 감시가 필요한 곳 등에 수많은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 누군가를 감시하기 위해서다. 감시를 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미심쩍어 한다는 의미다. 이제는 신뢰가 꼭 필요한 곳에서도 카메라의 설치가 요청되고 있다. 수술실에서 대리수술을 하거나, 의사의 수술 과실을 밝히기 위해 CCTV를 달아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두고 국회에서 설전을 벌이고 있다. 수술실 성희롱과 대리수술이 사회문제로 대두됐기 때문이다. 극히 일부이겠지만 의사들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오른 셈이다. 이러한 일과 거리가 먼 대다수 의료인들은 CCTV 설치를 반대하고 있다. 자신들의 의료행위가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술실에서 불미스러운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CCTV 설치 문제는 수면 위에 떠오른다. 의사들이 누군가로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다는 것은 즐겁지 않은 일일 것이다. 반면 대중들은 의사를 믿을 수 없다고 CCTV를 달자고 주장한다. 이렇게 서로 불신하는 사회를 두고 프랑스 철학자 미셸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판옵티콘 구조의 사회가 됐다고 진단했다. 판옵티콘은 그리스어로 판(pan 모든) 옵티콘(opticon 보다)의 합성어다. 누군가 감시하는 시스템이 현대의 사회구조라는 의미다. 이 감옥의 구조는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라미 벤담이 고안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가운데에 서 있는 높은 감시탑을 중심으로 빙 둘러있는 감옥이라는 교정시설을 그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앙의 높은 감시탑에서는 누군가가 감옥의 죄수들을 감시하고, 감옥의 죄수들은 감시당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죄수들은 스스로 감옥의 규율을 지키며 위계질서에 순종한다. 이렇게 감시탑의 바라봄과 감옥의 보여짐이 분리된 체계에서 죄수들은 살아남기 위해 알아서 기어야 한다. 즉, 감옥이라는 권력조직이 상정해 놓은 규율과 질서를 잘 따르지 않으면 처벌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옵티콘의 구조가 지속되는 것은 이 구조가 경제적이며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 구조가 중앙 부처의 어느 곳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CCTV처럼 사회의 곳곳에서 다양하게 일어난다. 누군가를 감시하는 자도 감시당한다. 이런 판옵티콘의 사회는 지배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대중을 감시할 수 있다. 전체주의 사회가 쉽게 탄생된다. 독재자가 마음만 먹으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춰 놓고 빅 브라더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이러한 모습을 소설로 그려 본 것이다. 조지 오웰이 이 소설을 탈고한 해가 1948년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소를 중심으로 냉전이 시작될 무렵이다. 그는 미·소를 중심으로 한 스파이전이 세계를 두 진영으로 나눠 서로를 감시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 우려했다. 그는 소설의 제목을 1948로 정하기에는 너무 직접적이고 현재적이어서 끝의 두 자리를 바꿔 ‘1984’로 바꿔봤다. ‘1984’는 추상적 미래를 의미한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 곁에는 그가 내는 소리 하나하나까지 포착 감시하는 텔레스크린이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빅 브라더의 감시 하에 살고 있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통제와 감시는 악몽과도 같다. 그러나 빅 브라더는 국가안보나 사회질서를 내세우며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지금 북한의 김정은은 빅 브라더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빅 브라더와 가장 닮은 유형의 인물일 것이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은 ‘타임’지와 인터뷰하면서 김정은은 ‘정직하고 결단력이 있고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복형과 고모부를 처참하게 죽였으니 그가 정직한지는 모르겠고, 결단력 있는 인물임은 틀림없다. ‘타임’지는 ‘많은 북한 감시자들에게는 문 대통령의 김정은 변호는 망상성(delusional)에 가깝다’라는 불편한 심기를 붙여 놓고 있다.

‘1984’에서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빅 브라더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일기를 쓴다. 이곳에서는 일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25년 노동 징역을 받는다. 몰래 일기를 쓰려고 하지만 쉽게 쓸 수가 없다. 빅 브라더가 시키는 일만 하다 보니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펼치는 능력을 차츰 상실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어 말살정책을 사용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살기 좋은 사회는 서로를 믿고 감시하지 않는 사회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서 CCTV를 곳곳에 달며, 범죄를 감시하고 있다. 범죄는 줄어들지 않고 더 많은 CCTV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수술실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의사를 감시하는 것으로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지만 의료인들의 도덕성 확립이 선행돼야 한다. 그것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CCTV 설치도 무용지물이 될 공산이 크다.

조지 오웰과 미셸푸코가 우려했던 ‘디스토피아’인 판옵티콘 구조의 사회가 여전히 남한과 북한에서 진행형이다.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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