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삶의 ‘에티카(eth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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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삶의 ‘에티카(ethika)’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3.03 0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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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없을 듯싶지만, 선거철이 되면 온통 나라가 정치 이야기로 도배된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자연히 정치의 자장(磁場) 속에 빠져든다. 어느 후보는 도덕성이 떨어지고, 누구는 경제를 잘 모른다고 인물을 폄하하기도 한다. 20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던 이야기는 지금도 유효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5000여 명 정도 살아가는 도시국가를 배경으로 그런 말을 했지만, 규모가 훨씬 큰 국가를 이루며 사는 지금도 정치가 우리 삶의 큰 테두리를 결정짓는다. 투표를 통해 어느 당이,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개개인의 삶도 사회적, 경제적, 정신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일인 독재나 과두정이 아니라 하더라도 정치 성향과 정책이 나와 다른 정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나의 삶은 그 정치세력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정치에, 투표에 무관할 수 없는 이유다. 

정치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이다.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조정, 혼합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가진 자, 힘 있는 자, 권력이 있는 자보다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가 더 배려돼야 한다고 프랑스 정치 철학자 랑시에르는 주장하지만, 2000년 전이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치꾼들이 자기들만을 위한 욕망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욕망이 극단에 치우치지 않을 때 중용(中庸)의 덕이 이뤄진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동양에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하고, 바꾸지 않는 것을 용(庸)’이라 했다. 중(中)은 공간적으로 양 끝 어느 곳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인데 비해, 용(庸)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바뀌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어 ‘meden agan(메덴 아간)’ 즉 영어의 ‘not too much’,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의미한다. 이러한 중용의 덕은 본성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습관으로 획득하는 것이며, 그것은 화살이 과녁을 맞추는 것처럼, 원의 중심을 찾아내는 것처럼 어렵다(hamartia, 그리스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다. 그는 중용의 덕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올바른 이성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따르면 동물은 본능(physis, 그리스어)에 따라 살아가지만, 인간은 이성(logos)이 있기에 본능을 억누르면서 살아간다. 동물은 배고프면 먹으려 달려들지만, 인간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고 판단해 먹는 행동에 이른다. 이러한 패턴은 인간 개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적 집단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것으로 개인이나 사회의 성숙도도 가늠될 수 있다. 올바른 이성의 실천은 본능적 행동을 넘어서는 인간 고유의 기능이다. 올바른 이성을 실천하려면 도덕적 감수성을 계발하고 생활화하는 습관이 요구된다. 그리스어 ‘습성(ethos)’은 영어의 습관(custom, habit)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습관의 반복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성격(character)’이다. 제2의 천성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격과 관련된 것들을 다루는 것이 ‘윤리(ethics)’다. 윤리는 그리스어 ‘ta ethika(에티카)’에 해당한다. 이것은 외부의 물리적 강제에 의해 행해지는 ‘도덕’의 뉘앙스와는 다르게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내부적, 심리적 정서의 뉘앙스를 품고 있다.

인간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왜’라는 질문을 하고, 그것에 ‘때문에’라는 답변을 한다. 일상적 삶 외에도, 자연과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도 ‘왜’라는 질문을 하고 그것에 ‘때문에’라는 답변을 하며, 그 세계를 풍성하게 만든다. 여기에 인간의 숙고(熟考)의 과정도 뒤따르게 마련이다. 탁월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깊은 사유의 과정이 요구된다. 사람은 정의감이 있어야 정의를 실현할 수 있고, 용기가 있어야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정의로운 행동을 하기 어려우며, 옳지 않은 습관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사람이 정의로운 행동을 하도록 습관을 들이는 것은 윤리 외에도 법적인 강제, 즉 정치가 필요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라본다. 윤리학은 사람을 설득하는 힘은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정치와 삶은 분리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돼 있다.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윤리와 정치가 함께 작동돼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작동되는 ‘에티카(윤리)’는 본성이 아니라 노력에의해 얻어진다. 개인이나 사회집단에게 그것이 부족할 때, 인간과 사회의 품위에 손상을 입는다. 에티카보다 ‘날것(raw)’의 동물적 본능이 날뛸 때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도 어렵다. 선거에서 상대방을 비방하고 음해하여 파국으로 몰아넣으려는 정치권의 수준 낮은 날것의 모습을 바라보며. 올바른 이성에 의거한 투표로 정치권에 추상(秋霜)같은 심판을 내리시길 권유한다.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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