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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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의 의미
  • 최교성 세례자 요한 <홍주성지 전담 신부>
  • 승인 2022.03.10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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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식당에서 일하시는 어르신을 ‘할머니!’하고 불렀다. 그런데 옆에 계신 다른 젊은 아주머니가 내게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저분 할머니라고 하면 기분 나빠한다고…. “그럼 뭐라 불러요?”하고 되물으니 아줌마라고 하란다.

오늘날 주변이 모두 나이 드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 문화가 되고 있는 것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란 단어가 없어지기 일보직전이다. 아줌마, 아저씨만 남게 생겼다. 우리네 일상에서도 죽음의 흔적을 다 내다버리는 문화가 돼 간지 오래다. 

장례식장도 묘지도 납골당도 우리 동네에 들어오는 것만은 반대하는 분위기이다. 우리들 삶 안에서 보이지 않게 밖으로 내몰았다. 마치 죽음이 없는 것 같이 만들고 있다. 그러다보니 나이 듦과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을 터부시한다. 착각이라도 해서 죽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보다. 삶의 의미의 뿌리가 되는 지혜가 있다. 올바르게 늙기 위해서는 늙어간다는 사실을 내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것 같다. 늙어 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늙기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다고 일흔, 여든이 40대로 바뀔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려 하고, 그러다보니 심각한 거짓에 빠지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늙었다는 것을 가리고,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젊음을 가지기 위해 수단 방법을 안 가리지만 사람들은 금세 알아차린다.

물론 코미디 같은 이런 식의 위장은 성공하지 못한다. 갖은 성형수술로 도배도 하고 디톡스도 하지만, 이런 거짓됨은 오히려 우스꽝스러움까지 더해지기 일쑤다. 그래서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더 진실하게 받아들일수록, 늙음의 의미는 더 깊어지고 통찰력이 생겨 더 진리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순수해진다. 그러면 더 참되고 가치있게 될 것이다.

유년기, 청소년기, 장년기, 노년기 모두 제각각의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 전체 속에서 각각의 성장 시기는 저마다 모두가 중요하다. 모두가 인생 전체에서 어느 하나도 뺄 수 없는 중요한 시기들이다.

노년기 역시 세상이 만들고 가공한 사회적 가치는 비록 사라지지만 인생에서 완성을 하라는 의미가 있다. 노년은 그저 말라가는 샘도 아니다. 노년 역시 하나의 삶이다. 생명이 허물어가는 과정도 아니다.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죽음은 단순한 중단이나 소멸이 아니다. 나이 듦과 죽어감 역시 삶의 한 부분이다. 유럽 언어 중에는 죽음을 의미하는 ‘마치다’의 동사에는 ‘완성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완전하게 끝내다’의 의미가 있다. 올바르게 죽는 이 기술은 죽음을 의미 있게 받아들 때 가능해진다. 어차피 모두가 만나는 것이라면 나쁜 죽음이 아니라 좋은 죽음으로 만들어 가야 하지 않는가?

사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종교차원의 문제와 관계를 갖는 일이기도 하다. 영원함과 관계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인들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다면 아마도 이 죽음을 좀 더 잘 적응할 것이다. 이승이 전부가 아니다. 영원한 절대자로 귀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평소 은연 중에 잘 쓰는 말 중에 ‘돌아가신다’는 말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승은 지나가는 과정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과 종교는 내세를 향하게 한다. 이제 무게중심을 영원에 두게 된다. 세상의 문제를 좀 더 가볍게 받아들인다. 

유럽인들은 어릴 때부터 성당서 자라고 매 주일마다 성당에서 조상들의 무덤을 마주한다. 자기 역시 그곳이 마지막 갈 곳임을 늘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현실을 즐기며 감사하게 살아간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전체 속에서 오늘을 보는 혜안이 있는 것이리라. 그러기에 현실의 고통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여유가 있다.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과 죽음을 외면한 채 살아가다가 갑자기 들어 닥친 사람들의 끝은 너무나 다를 것이다.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고 유년기~ 노년기까지의 삶 전체를 잘 통합시킨 사람들이다. 

자연을 바라보라! 자연은 모든 것을,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의연함이 있다. 이걸 잘 받아들이는 작업을 자연에서, 진리 앞에서 신 앞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순교자들은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오히려 신을 만나기를 고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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