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바지락 그리고 어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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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바지락 그리고 어버이
  • 최윤종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4.2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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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 빛 산자락에 진달래가 불그스레 필 무렵, 이제 5월에 이른다. 우리 고장에서 이 즈음이면 바닷가 뻘로부터 올라온 제철 바지락이 오일장 어물전에 대박 인기가 있다. 바지락 조개가 제철이다. 어릴 적에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이 제철 바지락에 나는 언제부터인가 완전 매료돼 있다. 

아내가 팔을 걷어 부치고 제철 바지락에 고추를 송송 쓸어 넣어 보글보글 끓여준 바지락탕은 그야말로 감동이다. 뽀얗게 우러난 우유빛 국물은 우선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호호 불면서 살집이 도톰한 바지락을 까먹는 쏠솔한 재미와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킬 때 저절로 나오는 탄성은 평양 감사도 부럽지 않다.

기억의 풍경을 더듬어 보면 어릴 적 이미 하늘나라에 가신 나의 어머님께서도 제철 바지락 조개를 무척 좋아하셨다는 아련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때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내 국그릇에서 어머니의 국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바지락 한 국자와 국물을 부어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노계 박인로(1561~1642)의 조홍시가(早紅柹歌)를 떠올려 본다. “반중조홍(盤中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 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글로 설워하나이다.” 

필자도 나이가 드는지 이 시구를 두 세 번 떠올릴 때면 저절로 목이 메어 있고 눈시울이 촉촉해져 있음을 느낀다. 작년에 대학에 진학한 아들이 올 해 2학년이 되면서 기숙사에서 나와 자취를 하게 됐을 때 어렵살이 방을 구하고 살림살이를 놓아주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핸들을 붙잡고 일만 가지의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가면서 나는 홀로 울었다. 

요즘에는 어쩌다 그 녀석에게 핸드폰 문자라도 오면 아내와 나는 무슨 경사라도 난 듯 서로 자랑하며 즐거워한다. 이제는 내가 부모가 되어 자식 걱정이란걸 하는가 보다.
원치 않게 불어닥친 코로나19의 펜데믹 현상은 모든 체계를 바꾸어 놓는 뉴노멀(New Normal)을 낳게 됐다. 모든 것이 거리두기로 전환돼 언택트(Untact)가 정의인양 일상화 되고 있는 시점이다. 

자칫 가족의 테두리 마져도 거리두기 일상으로 나눠진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란 말인가? 근래 오미크론의 대유행으로 한 가정 안에서도 그렇게 문을 잠그고, 선을 긋고 안타까운 시간을 보냈음이 자칫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정착돼서는 아니 될 것이다.
따라서 한 가정 안에서, 더 나아가 우리 사회는 서로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흔히 하는 말로 “몸은 멀어져도 마음은 가깝게” 이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가정의 달’이라고 일컫는 5월이 되면 이미 우리 정서와 삶에 체득이 돼 있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기대하는 바가 있다. 무엇을 기대하는가? 소식을 기대한다. 여기에 안도의 한숨이 있고 애정의 확인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카네이션을 들고 직접 대면 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이것이 어렵다면 전화를 통해서 밝은 음성이라도 들려 드리면 좋을 것이다. 여기에는 항상 그렇듯이 감사의 표현이 백미이다. 감사 표현은 감사를 하는 사람이나 감사를 전달받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카네이션 만큼이나 웃음꽃을 안겨주는 특징이 있다. 가능하다면 부모님의 필요를 꼼꼼히 확인해 보고 택배서비스 등을 활용해 못 다한 효도를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부모님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챙기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하다못해 박인로의 시조처럼 홍시를 건네드릴 어르신이 계시지 않다면 이 사회에서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 살피는 것도 좋을 것이다. 모든 물이 낮은 곳에 모이듯 언제나 진리는 높고 화려함보다 낮고 소박한 곳에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며 오히려 감동의 선물을 스스로 받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들의 ‘가정의 달’ 5월 맞이는 어찌해야 할까를 고심하며 새 날 맞이를 하고픈 필자의 마음을 이 지면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이를 가볍게 보고 지나치기 보다는 어여삐 보아 주시고 같은 고심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감히 건네고 싶다.

아마도 5월 제철 바지락이 그토록 속살이 도톰하게 올라오기까지는 늦겨울 혹은 이른 봄 아직 옷깃을 세우게 되는 해변의 찬바람을 그 작은 맨몸으로 대담하게 마주했던 시간이 포개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다. 
어머님 아버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최윤종 <홍성침례교회 담임목사·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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