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정치, 윤리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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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정치, 윤리의 몰락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5.05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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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존속 시키는 행위인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숲속에서 자연인처럼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환경적 요인이 아니라면, 큰 깨달음을 얻으려는 불굴의 의지가 아니라면, 쉽지 않다. 미국의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콩코드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한적한 삶의 맛을 《월든》에 그려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2년에 불과했다. 그것은 사람이 자연을 벗 삼아 한적한 삶을 꿈꾸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벗어나 일상을 지속하기란 쉽지 않은 일임을 말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규정한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이에는 욕망이 부딪힐 수 있기에, 나보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 삶을 편하게 사는 방편이 될 수 있다. 이기적인 삶보다는 타인을 헤아리는 삶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이런 생활 방식이 자신의 정신건강도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고 세계적인 선승(禪僧) 조안 할리팩스(Joan Halifax)는 가르친다. 선진유학(先秦儒學)의 인, 의, 예, 신 뿐아니라 불교의 자비, 서양의 에티카(ethika). 사랑, 덕이라는 개념도 여기에서 출발했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를 석가모니, 공자, 예수는 주변에 설파했다.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들이 이미 2천여 년 전에 말해놓았다고 하면서 그것을 기축시대(axail age)라고 불렀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과학 기술은 변해 왔지만 이들이 말한 도덕적 가치 기준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은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고 환경에 대처하는 방법도 달라지게 했다. 인류에게 페스트가 공포의 대상이었다면, 코로나 19는 극복의 대상이 되고 있다. 페스트로 인하여 신의 위치가 흔들렸지만, 코로나 19는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꿀 것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지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늘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설정이다. 타자를 먼저 배려하고 사랑해야 하는 ‘에티카(스스로 지켜야 하는 윤리, 도덕, 예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지 않을 때,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폭력이나 전쟁으로 발전됐다. 석가와 공자, 예수가 자비와 인과 사랑으로 타자를 감싸야 한다고 설파했지만 늘 그 자리는 빈 여백으로 남아있다. 개인이나 사회가 그 여백을 줄여 나갈 때 행복한 삶과 건강한 사회가 조성될 수 있다. 너보다는 내가, 너희들 보다 우리가 먼저라는 상(常)스러운 사회에서는 갈등과 증오와 전쟁을 면(免)하기 어렵다.

분열되고 양극화 된 사회에서는 증오심이 자란다. 그러한 사회와 국가의 수명은 길지 못했다. 물질과 권력을 많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갈등만이 사회와 국가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이데롤로기의 갈등은 더욱 심각하다. 이문제로 사회가 나뉘어 갈등하며 선거를 치루고 났을 때 그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평소에 잘 지냈던 사람들도 허구적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데면데면해진다. 특히 정치 사상적 좌, 우 이데올로기는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진지도 오래건만 우리는 무용한 이것을 붙들고 인간관계의 주춧돌로 삼고 있다. 진보, 보수라는 허상을 붙들고 서로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이 지구상 어디에 이렇게 많이 남아 있단 말인가? 이것을 부추겨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에 속아 우리는 자동인형처럼 조종당하며 말판 위를 생각 없이 뛰어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직접 민주주의를 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커진 사회에서는 대표를 선출하여 이들을 통해 국가를 통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선출하는 과정과 방법뿐만 아니라 이들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이들을 강제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선출된 대표들이 강제되지 않는 방법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면 간접 민주주의는 그들의 횡포를 막아내기에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펀드 매니저가 고객의 돈을 제제 없이 마음대로 써서야 되겠는가? 미국의 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은 『연방주의자 논설문』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면서 대표들의 고매한 도덕성을 강조한바 있지만, 에티카가 몰락해 있다면 이것은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임을 한국의 ‘검수완박’은 보여준다.

인류는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높은 도덕성을 함양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지만 개인과 사회의 에티카는 점점 더 몰락해 가고 권한을 위임 받은 정치 대리인마저 강제 받지 않을 꼼수를 찾아가고 있다. 엉성하게 관리되는 민주주의라는 테두리 속에서 우리는 주구장창 윤리와 도덕의 회복만을 부르짖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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