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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만성 <미술작가>
  • 승인 2022.06.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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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는 그림그리기 〈47〉
박승하(78) 〈옛 집〉 36×26㎝ 수성싸인펜.

주말이 끼어있는 월요일에는 어르신들 만날 일이 더욱 기대됩니다. 어르신들이 댁에 계시는 동안 그림을 그려오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집에서 그리는 그림을 숙제라고 하십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던 학생 때처럼 다시 공부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다만 나는 “잠이 안 올 때 그림을 그리세요”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잠을 자다 깨면 다시 잠을 자기가 어려울 때가 있고, 잠을 더 자려고 애쓰기보다는 뭔가를 하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 오히려 잠을 잘 수 있던 것을 생각해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박승하 어르신은 지난주에는 못 나오셨습니다. 집안의 상사(喪事)가 있어 한 주 걸러 나오셨는데 숙제를 해오셨다고 스케치북을 펼쳐 보여주셨습니다. 이웃에 사시는 어르신에게 숙제가 무엇인지 물어서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어르신들이 그린 것은 어린 시절에 살던 고향집이었는데 박 승하 어르신이 그린 것은 당신이 생애 처음으로 장만했던 집이었습니다.  

“33살에 그때 돈 일백만 원 주고 샀다”고 또렷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쌀 계를 미리 탔고 아는 분이 보증을 서줘서 은행의 돈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에 집을 살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바닷가니 김 농사를 하면 금방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였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막혀 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고 빚만 더 늘어나 집을 곧바로 되팔아야 했다고 하셨습니다. 집을 팔고 나니 집 주변이 개발되면서 집값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라고 허탈해하셨습니다. 박승하 어르신의 그 집에 대한 감정은 허망함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도화지에 집 한 채만 크고 가득 차게 그리셨습니다. 방이 어디에 몇 개였는지, 마루는 얼마나 넓었는지, 창고는 어느 쪽에 있었고 지붕을 언제 양철로 바꿨으며 파란색 페인트를 누가 칠했는지, 우물은 어디에 있는지를 세세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채색을 여러 번 하셔서 보풀이 일어나 있고 색감은 중후하였습니다. 아름답기보다는 의미가 크고 깊은 그림이었습니다. 

 

 

 

전만성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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