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상태바
권력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9.07 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훌륭한 고전 문학 작품을 읽고 나면 감동의 긴 여운이 남는다. 어느 시대에만 유효한 감동을 주는 작품은 그 시대와 함께 사라지기 쉽다. 작품이 읽을 만한 정전(canon)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작품의 여러 가치가 세월이 바뀌어도 빛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소위 동서양 고전이라 하여 대학에서 교양 필독서로 선정해 놓은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들이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도 4대 비극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줘왔고, 지금도 세계 어디에선가 그의 작품이 공연되고 있다. 특히 ‘리어 왕’은 리어라는 인물의 성격적 결함으로 인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비극으로 내몰린다. 그가 권력에 취해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필부필부(匹夫匹婦) 삶에도 적용될 수 있는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를 담고 있기에 그 파장은 크고 넓다. 

리어는 늙어 노망이 나서 딸들에게 왕국을 분할해 주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딸들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를 보고 왕국을 분할해 주겠다는 권력에 도취된 리어의 광기와 미숙함이 문제라 할 수 있다. 리어는 딸들에게 일종의 사랑 경연대회를 열어 누가 누가 나를 지극히 사랑하는지를 보고 왕국을 분할하겠다는 어린아이와 같은 발상을 한다. 

왕국을 나눠주려고 하면서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의 질문에, 큰딸 거너릴은 ‘아버님에 대한 저의 사랑은 말로 다 표현 못 할 정도이며, 모든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둘째 딸 리건은 ‘다른 모든 기쁨은 모두 저의 원수이고, 오로지 아버님에 대한 사랑 속에서만 행복’을 느낀다고 사탕발림을 한다. 그러나 리어가 가장 사랑했던 셋째 딸 코델리어는 ‘아버지의 사랑은 세 치의 혀로 발설할 수 없는 것’이기에 아버지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리어는 대답하지 않는 코델리어를 한 푼도 주지 않고 프랑스로 내쫓는다.

사랑을 척도로 왕국을 분할해 주겠다는 리어의 미숙한 결정은 비극의 단초(端初)가 된다. 왕국을 절반씩 나눠 받은 거너릴과 리건은 연합해 아버지가 자신의 집에 병사를 거느리고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려고 한다. 왕국을 줬으면 그만이지 1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딸들 집에 머무르는 행위는 유사시에 아버지가 이 병사들을 통해 군사력을 행사해 왕국을 다시 빼앗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왕의 품위를 지키려는 아버지의 겉치레를 딸들은 정치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딸들은 병사의 숫자를 절반으로, 아니 한 명도 남기지 말 것을 요구한다. 군사력을 상실한 리어는 권력도 없고 권위마저 세울 수도 없다. 급기야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광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딸들로부터 궁정에서 쫓겨난 리어는 거지 행색 차림으로 비바람 몰아치는 광야에서 딸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울부짖는다. 그러나 오히려 이 극한의 처지에서 그는 가난한 자들의 모습에 연민을 느끼며 그들에게 눈길을 돌리게 된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세상에 눈뜨는 자아 성찰의 계기가 찾아온다. 

‘리어 왕’에는 리어가 세 딸에게 왕국을 상속하는 메인 플롯(main plot) 외에, 글로스터 백작의 적자 에드가와 서자 에드먼드가 아버지의 재산을 놓고 벌이는 서브 플롯(sub plot)도 작동한다. 서브 플롯에서, 일이 안 풀리면 인습과 절차를 무시해서라도 되게 하려는 르네상스형 자아창출자 에드먼드는 인상적이다. 그는 권력과 재산을 얻기 위해 도리와 윤리 따위는 헌신짝처럼 버리는 마키아벨리 형 인물로 그려진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1605년은 영국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신흥자본가들이 출현하던 시기였는데, 셰익스피어는 이 시기의 사회적 변화를 ‘리어 왕’을 통해서 그려내고 있다. 그 시기의 새로운 풍조를 대변하는 인물인 에드먼드는 재산을 얻기 위해서 형을 속이고 아버지도 배신한다. 에드먼드의 배신 때문에 아버지 글로스터 백작은 두 눈을 뽑히게 된다. 형 에드가는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황야를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에드가는 짐승과도 같은 비참한 생활 끝에, 글로스터는 두 눈을 잃은 후에 에드먼드가 자신을 속였음을 알게 된다. 잃고 나서야 눈을 뜨는 눈뜸의 모티프가 여기서도 작동한다.

아버지를 내쫓기 위해서 연합했던 거너릴과 리건은 에드먼드를 놓고 사랑 다툼을 하다가 한쪽을 죽게 만드는 막장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비춰진다. 프랑스로 쫓겨갔던 코델리어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영국에 군대를 파견해 언니들을 공격했지만 패배해 죽음을 맞이한다. 에드가와 에드먼드 형제는 결투를 벌인 결과 에드먼드가 죽는다. 이 모든 파멸을 보며 죽어가는 리어는 예전의 리어가 아니라, 성숙한 모습의 리어로 다시 태어난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재생의 모티프다. 그러나 ‘리어 왕’이 비극인 이유는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너무 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희곡의 서사구조 속에 선과 악의 대립, 르네상스 인간형과 봉건적 인간형의 대립, 효의 문제, 권력 도취의 문제 등이 녹아 있어 이 작품을 읽거나 보는 이에게 성찰의 계기를 만들어 준다. 

김상구 <전 청운대학교 교수,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