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존재를 지키는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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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존재를 지키는 울타리
  • 이동호 <홍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사>
  • 승인 2024.01.04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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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있었던 부끄러운 이야기. 한파를 견딘 스스로를 축하하기 위해 예산 덕산에 있는 온천에 갔다.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도로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온천 입구에는 ‘키오스크’가 서있었다. 키오스크(Kiosk)는 신문과 음료를 파는 매점을 뜻하는 영어 단어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인 주문 기계를 키오스크라고 한다. 사람들은 키오스크 앞에 줄을 서서 입장권을 구매했다. 

나도 줄을 섰다. 사람들은 차례차례 입장권을 받아 들고 뜨끈한 온천으로 갔다. 시간이 지나도 내가 서있는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나보다 늦게 왔던 사람들이 먼저 입장권을 받아 떠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오고 또 갔다. 내 앞에서 결제기와 씨름하고 있는 분을 보니, 카드를 꽂아야 하는데, 그분은 카드를 꽂지 않고 있었다. 이제 카드를 꽂으라는 기계의 메시지가 너무 조그맣게 나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답답함이 울컥하려던 순간 옆 키오스크가 비었다. 그곳으로 얼른 갈아타려는데, 그 기계로 오려던 사람과 부딪쳤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몸을 뜨끈하게 하려다 얼굴이 뜨끈해졌다.
 

이보라/유유/1만 7000원.

키오스크 뒤에 서있는 사람에겐 ‘불편’의 문제지만, 키오스크의 진짜 문제는 노약자 당사자에겐 ‘배제’됐다는 기분을 주는 것에 있다. 조금만 둘러봐도 키오스크가 노약자에겐 장애가 된다는 문제는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지난 홍성 바비큐 축제에서도 문제가 됐다.

키오스크는 대부분 비용 절감을 위해 설치한다. 그러다 보니 사업장에서는 저렴한 기계를 쓰게 된다. 저렴한 기계는 반응 속도가 느리고, 사용법도 직관적이지 않다. 터치 시간이 조금만 지체돼도 첫 화면으로 돌아간다. 뒷사람이 쳐다보니 눈치가 보인다. 어르신들에겐 돈 내고 하는 사회 적응력 ‘테스트 기계’인 셈이다. 대부분 현금 결제가 지원되지 않고, 조사결과 휠체어 이용자 74.4%는 사용조차 불가능하다고 한다.

노약자를 고려하지 않음에도 키오스크 문제는 사회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조작하지 못하는 것은 당사자만의 문제로 치부된다. 공통의 문제임에도 개인의 문제로 다뤄지는, 이런 사회적 차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앞줄에 서있는 어르신을 미워하게 만든다. 

이것이 법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책 <법 짓는 마음>의 저자 이보라 씨는 국회의원을 보좌하는 보좌관이다. 책의 부제는 ‘당신을 지킬 권리의 언어를 만듭니다’. 책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지킬 울타리를 우뚝 세우는 입법부의 이야기가 담겼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책임과 선행이 아니라, 법이 필요하다.

책에 나오는 대로, 키오스크 문제는 기계를 전부 교체할 필요 없다.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는 정도로도 개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방치되고 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그 가게 안 가고 말지’라고 우리는 단념하지만 사실 차별에 대해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우린 약자를 위해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차별에 대한) 법 적용 대상을 좁게 한정하지 않으면서 시설뿐 아니라 기기·사물의 사용까지 포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이와 같은 조치가 가능해진다. 그러면 키오스크로 차별받은 어르신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 권리 침해에 대해 진정하고, 인권위는 정부와 해당 사업장에 키오스크를 사회적 약자 친화적으로 바꾸도록 요구할 수 있다. 이러한 권리 침해 진정과 시정 조치가 반복되면 우리 삶에서 차별 행위란 무엇이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기준이 생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이 대상과 시설을 특정해서 일일이 규율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속속들이 발견되는 차별 행위가 차별받은 사람의 요구로 시정될 수도 있다는 믿음이고, 실제 그 믿음을 구현할 사회 시스템일 테다. 그것이 차별금지법의 쓸모다.

우리가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사회적으로 받아서는 안 되는 차별 행위가 무엇인지를 법으로 규율하고, 실제 차별을 경험했을 때 침해된 권리를 어떻게 구제받을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일상의 차별들을 시정하고 예방하고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법이 정해 줘야 한다. 그것이 법의 쓸모다.

교권이 침해된다는 이유로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자는 말이 전국에 퍼지고 있다. 충남도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했다. 차별금지법은 번번이 막히는데, 있는 학생인권조례조차 폐지가 됐다. ‘학생의 교육활동에 필요한 교사의 권위’와 학생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실현에 대한 권리.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문제일까? 키오스크 문제는 키오스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키오스크가 고려하지 않고 있는 대상의 문제다. 키오스크를 전면 금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 업데이트하면 된다. 우리 사회도 한 걸음씩 업데이트해 가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책 <법 짓는 마음>을 덮으며 마지막 말을 곱씹어 본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참 살기 좋아졌네’라고 느끼는 순간은 어느 때일까? 물질적으로 풍족해진 것을 느낄 때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존재가 차별과 배제 대신 동등과 포용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때, 그리하여 모든 권리 가진 존재가 ‘특수한 개별’이 아닌 ‘평범한 보편’이 되는 순간 아닐까. 그 덕은 단언컨대 우리 모두가 함께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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