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일리터러시(illite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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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일리터러시(illiteracy)’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03.0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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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마차가 길거리를 누비던 시대 증기기관차의 등장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프랑스에서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으로 영화를 상영했을 때 영화를 본 사람들은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거리의 모습, 달려오는 기차를 보고 넋을 잃고 말았노라고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이처럼 과학, 기술의 발달을 놀라워하면서도 내가 그것을 이용해야 하는 현실이 됐을 때는 당황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핸드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을 ‘일리터러시(illiteracy:문맹)’라고 영어발음을 그대로 쓴다. 그것은, 적당한 단어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컴맹(computer illiteracy)’은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레이 커즈와일이 《특이점이 온다》에서 기술의 발전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시점이 온다고 예측했듯이, 요즘 인공지능의 발전은 눈부시다. 아직 인공지능이 인간지능과 결합하여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시점이 온 것은 아니지만 핸드폰을 비롯한 디지털 기기의 발전은 우리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핸드폰을 통해 사람과 만나고 소통하며, 게임도 하고 일상의 많은 일들이 이것을 통해 이뤄진다. 핸드폰이 없으면 불안한 사람들도 많다. 유튜브와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꾹꾹 누르고 수많은 정보를 저장한다. 현대인들은 정보를 소비하고 데이터를 축적하는 ‘정보광’이나 ‘데이터 페티시스트’가 돼 간다고 철학자 한병철은 《사물의 소멸》에서 진단한다. 그의 말처럼 디지털 질서는 세계를 정보화함으로써 탈사물화 한다. 

노리나 허츠는 《고립의 시대》에서 지금은 외로운 세기라고 명명(命名)한다. 가상현실에서 많은 일들이 처리되는 디지털 문명의 시대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다. 이런 삶의 패턴은 사물을 직접 대하는 방식이 아니어서 외로움을 낳고, 외로움은 사회적, 정신적 문제를 발생시킨다. 영국에서는 이들을 돕기 위해 외로움 부를 신설해 외로움부 장관(Minister of Loneliness)을 임명했다. 영국 런던시민의 4분의 3이 이웃의 이름을 모르고, 영국 직장인의 60%가 직장에서 외로움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이렇게 디지털 기기의 발전에는 어두운 뒷면도 발생하지만, 발전은 가속화될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디지털 기술은 외부에서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됐지만, 이제는 기술 자체가 스스로 목표가 돼 발전해간다.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보정 하기 위해 포토샵을 사용했는데 이제는 포토샵 자체가 사진을 합성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2024년형 포토샵에는 생성형 AI가 탑재돼 원하는 이미지를 반복해 만족할 때까지 이미지를 생성해 준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해야 할까? 예술이 무엇인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인식이 합의해 결정할 문제라는 발터 벤야민의 사유를 따라간다면 좋은 예술사진은 포토샵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냐에 달려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핸드폰에 들어 있는 카메라의 기능과 성능이 날로 발전해 사진의 수정과 보정, 조작이 손쉬워졌다. 조작된 사진과 동영상은 즉시 전파될 수 있고, 유튜브에서 많은 조회수를 올리는 영상들은 수입과 연결될 수 있기에 많은 가짜 영상들이 제작 유포되고 있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유포되는 이러한 시대가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한창 유행하던 시대에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 한 바 있는데 우리는 지금 그것을 목도(目睹)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명과 암은 개인과 사회에 함께 존재한다. 디지털기기를 쉽게 받아들여 윤리적으로 잘 사용하면 꼭 필요한 도구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챗GPT는 그 자리에서 답변하는 척척박사다. 리포트 작성에 유리해 챗GPT사용이 이미 학생들에게는 일상이 됐다. 리포트뿐만 아니라 글쓰기에 있어서도 챗GPT는 유용하다. 글을 잘 쓰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고, 모범이 되는 문장을 필사하며 그것을 내 글쓰기 스타일로 체득화하는 습작기간이 필요한데 챗GPT가 단축해 줄 가능성이 크다. 

챗GPT의 이러한 유용성이 책 읽기의 다양한 장점을 빼앗아가지 않을까 두렵다. 헐리우드의 작가들이 챗GPT를 사용하지 말라며 지난해 파업을 벌였을 때, 우리나라 웹툰 작가들이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챗GPT의 사용이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다. 만화를 그리는 직업도 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였을 것이다.

증기기관차, 영화를 보고 놀라던 시절처럼, 디지털 기기의 발전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급격한 발전은 당황스럽다. 일리터러시들이 스마트 폰을 쥐고 스마트한 도시에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은 스마트하지 않다. 디지털 기기 문명을 선도하거나 따라가기 위해서 학교에서는 더욱더 창의적 교육내용과 교육혁신이 필요한 시기지만, 문명의 기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일리터러시)에게는 반복적인 교육과 배려가 지역사회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때이기도 하다. 일리터러시도 사회 구성원의 일원이다.
 

김상구 <전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 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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