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희생자와 홍주의사총과의 관계에 대한 논문이 관심을 끌고 있다. 숭실대학교 성주현 연구교수의 ‘동학농민혁명 희생자와 홍주의사총 관계 연구’라는 논문이다.
성 교수는 논문에서 “홍주는 동학농민군의 피해(희생자)가 많았던 곳 중의 하나였다. 홍주에서의 희생자는 홍주성 전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홍주성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가 있었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던 중 1949년 4월 5일 홍성군수 박주철과 홍성경찰서장 박헌교가 직원들을 인솔하고 현재의 홍주의사총이 있는 대교리(大校里) 동록(東麓; 동쪽 기슭)에서 식목행사를 하다가 의외로 수많은 유골을 발견하면서 유골의 진위 논쟁에 휩싸이게 됐다. 그러나 당시 발굴된 유골은 ‘병오순란의병장사공묘비(丙午殉難義兵將士公墓碑)’라는 묘비를 세우면서 ‘1906년 병오의병’ 무덤인 홍주의사총으로 알려지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홍주의사총은 사적 제431호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홍주의사총 일대에서 발견된 유골이 900여 구에 이른다고 해 처음에는 ‘구백의사총’이라 불렸으나 1991년 6월 홍성의사총으로 병경됐다가 현재는 홍주의사총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문제는 홍주의사총이 여전히 동학농민군의 무덤이 아닌 의병의 무덤으로 돼 있다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따라서 그동안 의병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홍주의사총과 의병과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홍주성 전투와 1905년 의병 전쟁 당시의 홍주성 전투를 비교해 볼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오후 4시 25분 적의 한 부대가 빙고(氷庫) 언덕을 향해 전진해 왔다. 거리 약 400미터에 있는 벼 수확을 끝낸 논(早田)으로 접근해 오자 언덕 위에 있던 우리 군이 몇 번 일제사격을 퍼부어 적(賊; 농학농민군) 수명을 쓰러뜨렸다. 그래서 적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자기편의 인원이 많은 것을 믿고 끝내 빙고 언덕까지 전진해 왔다. 언덕 위에 있던 분대는 중과부적으로 퇴각해 서문의 오른쪽에 의지해서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저격했다. 이와 동시에 제5분대는 덕산(德山)가도 서쪽 북문 앞 가까이에 있는 고지에 모여 있는 적을 향해 세 번 일제사격을 했다(거리 800m). 적은 이 사격에 놀라 두 대열로 갈라져 도로 동쪽 고지 숲속에 진을 쳤다. 이때 홍주병(홍주병)이 북문에 배치돼 있던 대포 2발을 발사했다. 그 거리는 300m였다. 적이 흩어져 북쪽 숲속으로 들어가 갈라졌던 두 대열이 합쳐졌다. 이때 또 제2분대가 일제사격을 가해 적의 기세를 꺾었다. 적의 한 부대가 동문 전방 600m에 있는 숲속으로 들어가 서서히 전진해 왔다. 그리고 민가에 불을 지르고 연기와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이용해 성 밖 100m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연달아 맹격해 오므로 응원대를 동문으로 증파해 응전시켰다. 적은 밤이 되자 야음을 이용해 대포를 동문 밖 40m지점에 끌고 와 동문을 마구 쏘았다. 우리 군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오후 7시 30분 총소리가 거의 멈췄다. 우리 군과 홍주(洪州) 민병은 성벽에 의지해서 밤을 새워 경계했다. 26일 오전 6시 적은 세 방면에 엄호병을 남기고 약 1500m 되는 곳에 있는 응봉(鷹峰)고지로 퇴각해 진지를 점령하고 오후 4시 30분 패잔병을 응봉으로 모아 퇴각했다(빙고 언덕은 제외). 오후 5시 빙고(氷庫) 언덕의 적도 해미(海美) 방면으로 퇴각했다. 그래서 1개 부대(홍주병)를 내보내 추격했다. 오후 6시 속속 부상자와 도망자를 잡아 왔다. 포로의 말에 따르면 총인원은 6만 명이라고 했다. 그 실제는 3만 명 남짓 될 것이다. 27일 새벽부터 황혼에 이르기까지 속속 적의 도망자와 부상자를 잡아왔고, 적이 해미(海美)로 퇴각했다고 보고를 해왔다”고 ‘주한일본공사관기록’과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동학혁명 당시 홍주성 전투 상황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동학농민군은 홍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전투를 했고, 의병은 홍주성을 지키기 위해 전투를 했다는 점이다. 또한 동학농민군의 전투와 의병의 홍주성 전투에서 발견되는 유골의 위치가 각각 다르다는 점이다.
동학농민군의 유골은 홍주성 밖에서 발견됐고, 의병의 유골은 홍주성 안에서 발견됐다는 점이다. 1949년 유골이 발견된 곳이 홍주성 밖이었다는 것은 홍주의사총의 유골이 동학농민군의 유골이라는 점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홍주성 전투에 참가한 인원수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전투에서 희생자 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홍주성 전투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최소 7000명이며, 많을 때는 수만 명 또는 6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의병의 경우에는 최소 200명에서 최대 5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희생자 또한 동학농민군의 경우 최소 200여 명, 600~700여 명에서 수천 명, 많게는 3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 측의 기록은 200여 명에서 수천 명으로, 동학 측의 기록은 수천 명에서 3만 명까지 나타나 있다.
의병의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80~100여 명, 300명에서 많게는 1000여 명으로 나타나 있다. 일본 측 기록은 82명, 의병이 남긴 자서전에는 300~100여 명, 대한매일신보에는 1000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시 전투 현장과 희생자에 대한 처리방안인데, 동학농민군은 유골이 발견된 북문(월계천)과 간동에서 처형을 당했으며, 동문 앞을 흐르는 홍성천에서도 가장 큰 희생자를 냈다. 특히 홍주성 전투 후 민보군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의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반면 의병의 경우는 홍주성 전투 후 선유사로 파견된 홍주군수 윤시영이 희생자를 연고자에게 대부분 찾아가게 했으며, 시친자(屍親者; 죽임을 당한 사람의 친척)가 없는 83명만이 성 밖에 매장됐다. 이상으로 추정해 볼 때 홍주의사총에 묻힌 유해는 발견 당시 900여 명으로 추정한 사실로 볼 때 83명의 의병의 유골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많은 희생자를 냈던 1894년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당한 동학농민군의 희생자 유골이었음이 확실하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