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사총, 동학농민군 무덤? 지역의 역사·정신, 사실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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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사총, 동학농민군 무덤? 지역의 역사·정신, 사실 밝혀야
  • 한기원 기자
  • 승인 2024.08.1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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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사총, 의병의 무덤? 동학농민군의 무덤? 〈5〉

동학농민혁명, 일제강점기 비적이나 폭도의 반란으로 매도
 홍주성 전투 의병희생자 83명,  “성밖 남산에 정성껏 매장”

 

홍주의총은 1906년 병오의병 항쟁에서 희생된 의병의 무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들어 홍주의사총은 의병의 무덤이라기보다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무덤’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관심이 쏠리는 형국이다.

이러한 주장의 일단은 학자들에 의해서도 제기되고 있지만, 지역에서도 지역의 얼굴이며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 사적이고, 지역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기 때문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어느 주장이 옳은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밝힐 필요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학자들이나 전문가, 관련 기관 등의 연구가 더 구체적으로 진행돼야 할 일이지만 지역에서도 지난 2015년 5월 홍동밝맑도서관 소식지 제26호에 홍순명 대표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당시 홍순명 대표는 ‘홍주의사총이 동학농민군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는 전제하에 지역에서의 문제 제기였기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홍 대표는 ‘어느 주장이 옳은지에 대한 필요성이 있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과 1906년 병오의병의 현장이었던 홍주성 전투에 참가한 인원수와 희생자수, 전투의 전개과정, 전투 현장의 검증과 그 시대의 사회적 인식을 여러 사료를 종합해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료와 통계,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과거 주장과 기록 등을 중심으로 밝히면서 ‘홍주의사총이 동학농민군의 무덤’일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홍 대표는 여러 기록에 나타난 1894년 동학농민군과 1906년 홍주의병의 전쟁 차가자 수를 열거하면서 “홍주성 전투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최대 6만 명에서 최소 7000명이고, 의병은 전투를 직접 지휘한 민종식·이용규가 1000명으로 재판과정에서 진술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홍주성 전투에 대해 기사를 쓴 언론매체들은 ‘700명, 또는 400~500명으로 잡고 있으며, 일본의 사료에는 200~500명으로 보고 있다’며 “이로써 동학농민군이 절대적으로 많은 수가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동학농민군과 홍주의병의 홍주성 전투 상황에 대해 종합해 보면 “동학농민군은 최소 200명(전쟁이 끝난 뒤 각지에서 홍주성에 압송돼 효수된 동학농민군 제외), 최대 수천명에서 3만 명으로 나타나고, 의병은 최소 82명 최대 1000명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1000명은 의병대장 민종식이 재판정에서 진술한 숫자로 참가자 전원이 전사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정황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의병의 경우 기록에 의하면 홍주성 전투 후 선유사로 파견된 홍주군수 윤시영이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 대부분을 연고자에게 찾아가게 했다. 다만 ‘연고자가 없는 83명을 홍주성 밖에 매장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연고자가 없는 의병 83명도 홍주성 안에서 희생됐으며, “성 밖의 한 곳인 ‘남산’에 정성스럽게 매장하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때 의병의 주검이 매장된 곳을 ‘남산’이라 한 것으로 볼 때, 홍주성의 북쪽이며 유골이 발견된 ‘대교리 간동이냐’ 하는 것은 확실한 고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희생자의 숫자나 의병의 시신 83명을 매장한 곳, 군수가 정성스럽게 매장하도록 지시한 사실 등으로 볼 때 홍주의사총에 묻힌 900여 명과는 상관관계가 먼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홍주의사총은 역사적 고증 없이 나이 든 어른의 추측성 대답만으로 ‘의사총’으로 단정하는 근거로 삼은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만약 의병의 주검이었다면 홍성천 주변에 수백 명의 주검을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의병의 주검 83명에 대해서도 정성스럽게 매장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홍주의사총에 묻힌 주검(유골)이 동학농민군의 주검일 것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실리는 이유다.

당시 홍순명 밝맑도서관 대표는 원고 말미에 향토사학자인 임성중학교 이상재 교장이 생전에 “홍주의사총? 그거 말짱 사실이 아니야. 당시 재판 기록에 숫자가 나와 있는데…”라고 밝혔던 사실과 동학연구가인 원광대 박맹수 교수의 저서 ‘개벽의 꿈’과 “홍주성 전투에 참가한 내포 지역 동학농민군의 참전기록을 주셨는데, 후자에서 동학농민군이 상당한 정신적 기율이 있었음을 알게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일본 역사가 나카스 카아키라(中塚明)가 쓴 ‘동학농민전쟁과 일본(東學農民戰爭과 日本)’과 ‘동학과 동학혁명의 재인식(성주현 지음, 국학자료원)’ 등의 참고자료를 제시하기도 했다.

동학농민혁명은 대한제국 시절과 일제강점기에 비적이나 폭도의 반란으로 매도되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국정교과서 등에 동학혁명을 ‘동학란’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4·19혁명 이후에도 ‘동학혁명’, ‘동학농민운동’, ‘갑오농민혁명’ 등으로 평가가 뒤섞여왔다. 이후 지난 2004년 국회의 특별법 제정으로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명명하게 되면서 예전보다 높은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동학농민군은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고귀한 희생은 항일의병전쟁과 대일항전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됐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일본군과 관군의 월등한 화력 앞에 동학농민군은 말 그대로 속절없이 죽어갔고 학살을 당했다. 동학농민군과 동학농민혁명을 당시 관군과 유생, 의병이라는 신분으로 깎아내리려는 무지한 역사 인식 수준은 아니었을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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