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홍성군 홍성읍 홍성의료원 인근에는 장군상 5거리가 있다. 이곳엔 홍성의 자부심이 우뚝 서 있다. 바로 백야 김좌진 장군의 동상이다.
이 동상은 지난 1983년 5월 31일 설치됐다. 높이는 11.8m이며 독립군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군상 인근에는 홍성종합터미널이 있다. 그래서 홍성을 찾는 이들을 처음 맞이하는 것도 김좌진 장군상이다. 그만큼 김좌진 장군은 홍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추앙된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홍성의 자부심은 땅에 떨어졌다. 정부가 새로 개정된 군의 정신전력교육 기본 교재에서 김좌진 장군을 누락한 탓이다. 문제는 공산주의 이력이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윤희석 국민의힘 대변인은 “당시 독립운동했었던 북간도 근처의 나라들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본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쪽이랑 연결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논리에 따르자니, 그동안 김좌진 장군을 극진히 생각한 홍성의 노력이 허망해졌다. 홍성이 한순간에 공산주의자를 배출하고 추앙한 불순한 지역이라는 말인가? 더욱이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 단체와 거리를 두고 활동을 하시다가 이들의 표적이 됐고, 결국 1930년 공산주의자에게 암살을 당한 것이 정설인데, 이 무슨 해괴한 주장이란 말인가?
앞서 불거진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김좌진 장군까지 수모를 겪는 모습에 답답함을 넘어 절망감이 밀려왔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떤 원리로 공동체를 이끌 것인지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E.H.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했다. 과거를 교훈 삼아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 나은 미래로 나가라는 뜻이다. 인간의 자아는 경험으로 구성되기에, 과거는 이미 지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핵심 재료이다. 따라서 기억이 왜곡되면 현재와 미래가 왜곡되고, 역사의 비극 또한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 대가는 후손이 감당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좋은 경험과 보편적으로 선한 기억을 발견하는 일은 중요하다.
불행하게도 김좌진 장군을 비롯해 최근 일련의 역사 논란은 우리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허술하고 보편성도 없다. 만일 공산당과 손잡고 일본에 맞선 것이 문제라면, 스탈린과 손잡고 독일에 대항한 미국과의 관계도 절연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공감할 수 있다.
작금의 혼란과 갈등은 정부 여당의 자유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온다. 자유는 변하지 않는 완성된 하나의 가치가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억압과 폭력을 극복하는 모든 활동이다. 자유는 늘 상황적 자유라는 뜻이다. 개인과 사회, 시대마다 자유의 조건과 형태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김좌진 장군은 자유의 투사다. 그들을 투사로 만든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과 폭력, 그리고 전체주의의 야만이다.
우리가 김좌진 장군을 기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오직 힘으로 타자를 굴복시키는 형식, 그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종류의 억압과 폭력에 저항했던 인간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일본에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다시는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각오다.
반공과 적의가 가득한 이념에 기대서는 그 어떤 문제도 풀 수 없다. 새로운 길을 찾으려면 창의적 인간의 발견이 중요하지만, 이념이 앞서면 사상의 자유가 위축되기에 생각이 큰 사람은 나올 수 없다. 또한 이념을 잣대로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사회에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적 정서는 함향되기 어렵다. 감정에 따라 앞뒤가 달라지는 부모를 둔 아이처럼, 힘센 사람의 눈치를 보며 줄 서는 나라가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불의와 억압에 저항하는 김좌진과 홍범도 장군 같이 고결한 인간은 탄생하기 어렵다.
공동체와 정의에 헌신하는 사람이 사라진 사회의 결말은 각자도생이다. 다시 야만의 시대가 꿈틀댄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