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자에서 향신으로-지역의 부활
상태바
방관자에서 향신으로-지역의 부활
  • 장정우 <공익법률센터 농본 활동가>
  • 승인 2024.09.05 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얼마 전 우리 지역의 농민들과 영농형 태양광 시설을 보기 위해 충북에 다녀왔다. 발전 시설을 소개해 준 농부는 아무도 농민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아서 발 벗고 나서게 됐다고 덧붙였다. 돌아오는 길에 몇몇 농민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유기농이나 환경만 운운하기에는 농촌의 여건이 더 악화되지 않았냐며, 영농형 태양광이 괜찮은 선택지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다달이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농민에게 월 100만 원가량의 수익은 분명 솔깃한 제안이지만, 영농형 태양광은 농민들 스스로 내린 선택이 아니라고 여겨지며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 답답함은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동의하기 어렵다는 데에서 오는 듯했다.
 

<주변의 상실: 방법으로서의 자기>
샹바오 지음, 우치 대담, 김유익·김명준·우자한 옮김/ 글항아리/ 2만 2500원

가령 다음과 같은 논의 이후에도 영농형 태양광은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이 20% 아래로 떨어진 상황에서 왜 에너지와 식량을 경쟁시키는가?’, ‘애초부터 우리나라의 농민은 왜 농사만으로는 먹고살 수가 없는가?’, ‘농촌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면 농촌과 도시 사이에 수천 개의 송전탑이 꽂힐텐데 왜 그로 인한 피해는 이야기하지 않는가?’, ‘현재의 에너지소비량을 기준으로 전환을 이야기하는 게 타당한가?’, 그뿐만 아니라 영농형 태양광을 농촌에 도입한다면 어디에 설치하는 게 적합하며, 얼마만큼의 용량이 필요하고, 누가 운영을 하며, 그 수익은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등등.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논의는 다 생략된 채로 ‘기후위기가 날로 심각해지고, 농민이 마침 돈을 못 버니 태양광 발전을 통해 농가 소득도 높이고 기후위기에도 대응하자’는 식의 해결책은 공허하게 느껴지고 거부감이 들 뿐이다.

인류학자 샹바오의 대담집 《주변의 상실: 방법으로서의 자기》는 시민들이 거대 담론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며, 그런 답답함(혹은 무력감)을 주는 현실에 맞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오늘날 인류가 온라인상으로는 오만 가지 것을 하지만 막상 우리 주위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주변’의 문제를 다루는 능력을 상실했으며, 물리적으로 지근거리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도 맺지 못한 무력한 ‘방관자’가 됐다고 지적한다. 

샹바오는 개인의 자아가 강조되는 한편, 큰 틀에서는 거대 담론(기후위기, 경제성장, 지역소멸, 인구감소, 청년실업 등)만 논의되는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대중의 경험과 유리되지 않은 구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어떤 문제든 그게 진짜 문제라면 모두 로컬한 것”(335쪽)이라며 개개인이 향신(郷紳)을 중요한 정체성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향신이란 원자화된 ‘나’와 거대한 세계 속의 ‘나’ 사이에 있는, 우리가 실제 발 딛고 생활하는 장소 속의 ‘나’라는 정체성이다. 실제 우리는 독립된 자아라는 정체성과 한국인 내지는 지구인이라는 큰 틀에서의 정체성은 강하게 갖고 있지만, 문당리 사람이나 홍동면 주민, 홍성군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점점 옅어진 채 살고 있지 않나. 그 결과가 무엇인가. 우리는 짤막한 온라인상의 글을 보고 마치 자신이 피해를 본 것처럼 갑자기 공감하거나 분노를 느끼다가 실제로 할 수 있는 행동을 찾지 못한 채 빠르게 식어버리곤 한다. 기후위기의 위험성에 목소리를 높이며 텀블러를 쓰고 907기후정의행동과 같은 전국 단위 집회에 참여해서 정부와 기업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지만, 여전히 무력함을 느끼는 것 역시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샹바오가 제언한 향신적 태도란, 우리 주변의 생활 속 문제를 정확히 관찰하고 그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해결책을 토론하는 것, 즉 우리 삶에서 직접성과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는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몸으로 문제를 만나고, 사람과 마주해 이야기를 나누고, 직접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장소, 즉 ‘주변’을 회복하자고 제안한다(여기서 ‘주변’이란 우리가 사는 마을, 지역, 공동체 혹은 로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주변의 회복’이다. “개인의 존엄성은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있던 것도 아니며 또한 한 개인이 홀로 사람의 존엄성을 추구할 수도 없다.”(405쪽) 오직 자신이 물리적으로 속한 마을과 지역에서의 생활에 충실하고 그 안에서 (인간)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우리는 잃어버린 존엄성과 삶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소멸을 걱정하는 사람,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사람 그리고 무너지는 세상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