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보광사 지법스님

[홍주일보 홍성=이정은 기자] 여든의 나이, 그에게 삶은 줄곧 고난으로만 점철된 고통 그 자체였다. 출가해 스님이 되기 전, 언뜻 평범해 보이는 청년이 서각(나무, 돌, 금속 따위에 글자나 그림을 새김. 또는 그렇게 만든 공예품)에 관심을 갖게 된 일화부터 또렷함과 혼미함이 뒤섞인 인생사까지 ‘이달세 군’과 ‘지법스님’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기자는 지난 10일 지법 스님과의 인터뷰를 위해 보광사를 찾았고, 보살님을 통해 제일 먼저 듣게 된 이야기는 이러했다.
“스님이 지난해에 아파트 3층 높이 정도 되는 나무에서 떨어지셔서 머리와 어깨를 수술하셨어요. 연세도 있으시고 대수술도 하셔서 대화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어요.”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스님과 마주 앉았다.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수십 장의 부적과 붉은 가루가 들어있는 작은 통이 놓여있었다. 기자의 시선을 알아챈 스님은 정월대보름을 맞아 보광사를 찾는 보살님들께 부적을 나눠주시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경면주사(鏡面朱砂)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돌가루라고 생각하면 돼요. 부적 쓸 때 이 가루와 유채 기름을 섞어 사용하는 거예요. 이제 곧 정월이라 보살님들이 우리 절에 오시면 값 받지 않고 한 장씩 드리려고. 그래서 요새 몇 날 며칠 이것만 하고 있네. 허허허.”
■ 서각을 만난 청년 이달세 군
눈살을 찌푸리며 “가만있어 보자”하고 말하는 스님의 얼굴은 뒤엉킨 실타래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마 그때가… 1965년이나 66년쯤 됐을 거예요. 제가 그때 서예 학원에 다녔고, 어느 날 서예 선생님과 추사고택에 가게 됐어요. 전시된 것도 아니고 그냥 구석에 먼지가 뿌옇게 쌓인 서각 작품들이 잔뜩 쌓여있더라고요. 그때 추사 선생의 작품을 보고 ‘야~ 이거 배워봐야겠다’ 마음먹게 됐죠. 이후에 서울 종로에 있는 한양목공예학원에서 목공예를 배웠어요.”
지법 스님은 몇 차례의 전시와 국전 수상 이력을 갖고 있다. 홍성도서관과 홍성문화원에서 서각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구항면행정복지센터에서 매주 월요일에 열리는 서각 교실에서 수강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상 받은 거야 뭐 많지마는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적 감각을 사용해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게끔 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고 가치 있는 거죠.”

■ 가난, 가출, 비관… 그러나
스님은 국민학교를 졸업했던 해를 1961년 박정희 대통령 5·16군사정변으로 회상했다.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던 이달세 군은 당시 홍주국민학교 강당 자리에 있었던 ‘재건 학교’를 다니며 밤에는 공부를 낮에는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후 광천, 광흥중학교(사립)로 편입해 공부했으나 나아짐 없는 가정 형편 탓에 졸업비를 내지 못해 졸업 앨범은커녕 졸업장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배움에 대한 열의는 매번 가로막히게 되고 그렇게 어린 달세 군은 사회를 비관하고 가출을 감행,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턱대고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대로 살기는 싫고 살아갈 방법은 도무지 모르겠고….”
기차에서 엉엉 울다, 대구 서문시장에서 건어물 가게를 운영한다는 아저씨를 만나게 된다. 달세 군의 사연을 들은 아저씨는 ‘먹여주고 재워줄 테니 가게 심부름이나 도와라’라고 말했고, 그는 그렇게 대구에 머물게 된다. 이후 아저씨와 친분이 두터운 공군 중령의 도움 덕분에 전파 공학에 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TV 학원에 다니며 전자 통신을 배우게 된다.
배움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당시를 되새기며 말하는 스님의 얼굴엔 미소가 흘러나왔다. 깊게 얽힌 주름 사이로 언뜻 청년의 얼굴이 스쳤다.

■ 나그네의 삶 “너무 아파서… 돌아오기 싫었어요”
스님은 경주 안강읍, 청양 칠갑산, 여주 등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현재의 보광사를 꾸리게 됐다. “어디 한 군데 정해진 거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죠. 스님들 찾아다니면서 염불도 배우고 불경 공부도 하고 돈이 없으니까 머슴살이도 하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지금의 보광사는 스님이 어릴 적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던 고향 집터이다.
“나는 홍성에 오기 싫었어요. 너무 고생하고 무시당했던 기억 때문에 마음이 너무 아팠거든요. 그런데 참 이상해… 다른 곳들은 계약하려고 하면 그날 저녁 아버지가 꿈에 찾아오시고 매번 계약이 이뤄지질 않는 거예요. 그러다가 문득 여기를 한번 가볼까 마음먹고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이 집터가 나왔어요. 지금 법당 있는 자리 뒤가 원래 샘이 있었는데 거기에 고기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거예요. 그래서 옆에 있던 바가지로 그 물고기들을 건져 올렸더니 반짝반짝 빛이 나면서 팔딱팔딱 뛰는데, 그때 아버지가 나타나셔서는 ‘네 고기들 잘 키워라’ 이러고 가시더라고요. 꿈에서 깨고 해몽을 해보니까, 이게 아무래도 여기에 절을 짓고 찾아오는 신도들을 잘 보살펴라 이런 뜻 같더라고요. 그래서 홍성에 오게 됐어요.”
기자는 지법스님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어떤 잔상 하나가 떠올랐다. 갈대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살고자 몸부림치다 보면 언젠가 이것도 춤으로 보일 날이 있을까’ 생각했던 날이었다. 검은 물가에 부는 바람은 갈대와 한 인간을 흔들었고 허공에 박주가리 씨앗을 흩뿌렸다. 고개를 떨구니 봄까치꽃이 수줍게 피어있었다.
유년부터 끈덕지게 따라붙었던 가난, 어찌할 바 모르고 도망쳤던 부산행 기차, 늦은 나이에 출가해 스님이 되기까지 이달세 그의 삶은 끝없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의 몸부림을 춤으로 보이게 해준 건 서각, 즉 예술이 아닐는지.
“저에게 삶은… 갈등의 집이었습니다. 제 나이가 이제 여든이에요. 오늘(지난 10일)도 저녁엔 구항에 가서 서각 수업을 해요. 그런데 이제 이 수업까지만 하고 유작을 잘 남기고 가야겠다는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 내가 줄 수 있는 건 다 주고, 가벼이 살다가 그렇게 가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