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 내게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 축구하는 게 고작이면서, 내 정체성에 ‘축구인’이 있다는 게 우습다고. 나는 괜스레 고개를 더 빳빳하게 세우고 답했다. 나는 어엿한 축구인이라고.
여성 축구팀 ‘반반FC’의 팀원으로 축구를 시작한 게, 올해로 3년이 됐다. 매주 일요일 오후, 운동장 위에서 소리치며 달린다. 어쩌다 한번 뻥 찬 공에 희열과 아쉬움을 흠뻑 느낀다. 그 순간 이 세계는 내 발끝을 보는 팀원들과 다정한 적들, 구르는 공, 그리고 이 악물고 달릴 뿐인 내 몸뚱이만 있다. 성과의 꼬리표가 따라붙기 마련인 스포츠 세계에서, ‘몰입’ 그 자체만으로 만족하는 자세는 일종의 기술이다. 게다가 뿌리 깊은 ’축구인 정체성‘이 아니라면 연마하기 힘든 기술이라 자부한다.
“나는 그저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이었는데 축구를 하며 나의 한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한계를 함께 뛰어넘는다고 느껴 왔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그 당연함을 누리지 못하는 쪽의 대부분이 여성들의 몫이라는 사실이 자주 서럽지만 또 한편 그것을 넘어설 때마다 경계와 선을 지워가는 모습이 너무너무 멋지다. ‘누구같이’가 아니라 그저 ’나이기 때문에‘하는 이 행위들이 그것만으로 운동이 된다는 사실이 서러웠던 내 마음을 조금은 다독여 준다.”(33쪽)

《시골, 여자, 축구》의 저자인 노해원은 놀라운 기억력과 유쾌한 문체로 ‘반반FC’의 역사를 그려간다. 해원이 그리는 운동장 위 여자들은 도드라지게 정치적인 존재들이다. 한 여성이 떠안은 ‘경계와 선’은 운동장 위에서 흐릿해진다. 운동장 위의 해원은 ‘쌈닭’ 기질의 공격형 미드필더, 쉽게 늘지 않는 실력에 고뇌하고, 주고받는 동료애에 감동하는 보통의 축구인이 된다. 해원뿐 아니라 나 역시도, 그리고 운동장을 차지한 여성들은 모두 “그저 ‘나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들에 점차 익숙해지며 성장한다. 엄마, 딸, 며느리 등 여성의 삶에 쉽게 붙기 마련인 이름표 없이, 오로지 내 몸으로만 순간에 존재한다. 같은 모습으로 땀 흘리는 동료들과 함께, 구르는 공을 향해 무딘 발을 뻗는 동안 여자이기 때문에 운동장 바깥으로 밀려났던 경험은 가뿐하게 무너진다. 운동장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여자답지 않다’는 이유로 드세다는 평가를 받았던 경험, 스스로 만든 한계점을 뛰어넘는 경험은 쌓이고 또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며 굳은살로 자리 잡는다.
경계와 선을 본인의 힘으로 지우고 재건하기를 반복하는 여성의 자유로움에는 힘이 깃든다. 마음을 간지럽히는 뜨거운 종류의 힘. “훈련장에 도착해 두 줄로 서서 운동장을 뛰는 스무명 남짓한 여자들의 뒤통수를 보면 마음이 벅차다. 흩날리는 머리칼을 보며 ‘이 사람들도 집 밖으로 나오는 길에 나처럼 해방의 터널을 지나는 기분이었을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축구하는 여자들을 볼 수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52쪽)
각자의 ‘해방의 터널’을 지나 운동장에 모이는 여자들을 떠올린다. 평생 응원석에 있던 사람도 한 번쯤 운동장 위를 달려보고 싶게 만드는 그 힘은 결연함보다 통통 튀며 반짝이는 경쾌함에 가깝다.
얼마 전 신입 부원을 모집하기 위한 반반FC 홍보 전단을 만들었다. 팀 운영진이 내게 건네준 홍보 문구는 이렇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면 일단 와서 해보고 고민해 봐요. 언제든 환영합니다.” 경계와 선을 넘는다는 말은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일단 와서 해보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이뤄지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분명 깊어지는 사랑과 우정이, 경쾌하게 반짝이는 즐거움이 있으리라는 걸 《시골, 여자, 축구》는 한 권의 책으로 이야기해준다.
나는 나의 팬이다. 축구 연습이 있는 일요일 아침이면, 유니폼 바지와 기다란 축구 양말을 갖춰 입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갈증 없이 잘 달리기 위해 매일 마시던 커피를 생략한다. 점심 메뉴마저도 축구에 맞춰 신중히 고른다. 나는 이런 ’일요일 아침의 나‘를 좋아하는 팬이다. 나의 가벼운 일상에 이런 태도로 대할 수 있는 활동이 하나쯤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나는 나의 팬이기도 하고, 나와 함께 달리는 반반FC의 팬이기도 하며, 서 있는 모든 장소에서 ‘나다운 모습’으로 살고자 분투하는 여성들의 팬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이 책을 응원의 마음을 담아 선물하고 싶다. 마지막 장을 읽고 책을 덮은 뒤 찾아올, 한층 씩씩해질 마음도 함께 미리 전한다. 모든 실패와 모든 성취를 만끽할 여성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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