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애환이 주렁주렁 매달린 노동을 반짝이도록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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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애환이 주렁주렁 매달린 노동을 반짝이도록 올려놓았다.
  • 정세훈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5.04.17 09:52
  • 호수 886호 (2025년 04월 17일)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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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서 맑은 시를 건져낸 고증식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얼떨결에〉
<strong>정세훈</strong><br>시인, 노동문학관장, 칼럼·독자위원<br><br>
정세훈
시인
노동문학관장
칼럼·독자위원

경남 밀양을 고향 삼아 밀성제일고, 밀성고, 밀성여중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농민 등 이웃들 삶에서 맑은 시를 건져낸 강원 횡성 출신 고증식 시인이 2019년 출판사 ‘걷는사람’에서 네 번째 시집 <얼떨결에>를 ‘걷는사람 시인선’ 11번째로 펴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그녀의 해맑은 웃음/그녀의 유난히 작은 키/그녀의 좁은 어깨에 매달린/세 살배기 쌍둥이 아들과/신용불량자 애기 아빠/혼자된 팔순 시어머니/누워 지내는 친정엄마/새벽까지 문 닫을 수 없는/그녀의 작은 포장마차에/늦가을이 한창이다.” 시인은 시집 <얼떨결에>에 앞서 언급한 시집 맨 앞에 실린 시 ‘주렁주렁’에서 알 수 있듯이 고단하고 안쓰럽고 힘겹고, 그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책임이 무거운 우리 이웃들의 애환이 천형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노동을 반짝이도록 해맑게 가득 올려놓았다. 

이정록 시인은 뒤표지글 추천사를 통해 “살갑다. 시가 살 같다. 뼈를 포옥 감싸고 있는 순살 같다. 마음 편하게 잘 뜯어 먹고 있는데, 어느 순간 목이 멘다. 가슴에 못이 박힌다. 가슴을 쓸어내리니, ‘피딱지 말라가는 성처’에 ‘박힌 못’이 꿈틀거린다. 뭉개진 못 끝에 새순이 돋고 실뿌리가 벋는다”면서 “그의 시에는 일상을 해동(解凍)시키는 봄이 있다. 생명과 절실함이 동의어임을 깨닫게 된다. ‘따뜻하고 유쾌하고 뭉클하게’ 다시 한번 살고 싶어진다”고 평했다. 또한 “물 같다. 시가 물 먹은 사막 같다. 촉촉하다. 시인은 사막에 내리는 비처럼, 모래알 씹는 것 같은 세상살이를 찬찬히 어루만져 따스하게 바꿔놓는다. 모래에도 싹이 틀 것 같다”며 “사막에 내리는 비는 ‘어마비’다. 사막 모래는 순하게 무릎을 꿇고 새끼를 품는다. 고증식의 시는, 그 둥근 능선 사이에 물길을 낸다”고 논했다.
 

전영규 문학평론가는 ‘따뜻하고 유쾌하고 뭉클한 노랫가락 메들리’라는 제목의 시집 해설에서 “모든 이들의 허기진 가슴을 채워 넣는 시인의 언어는, 감당하기에도 벅찬 삶의 기구를 겪는 자들에게까지 나아간다. 시인은 그들의 삶을 통해 삶이라는 고해를 다양한 방식으로 견디어내며 살아가는 가여운 인간이라는 존재를 발견한다”며 “죽을 힘으로 사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아는 인간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 그 안에서 희노애락을 경험하는 일, 시인이 구현하는 인간의 정서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건, 그들의 다사다난한 곡절들을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마음 아파하는 시인의 마음씨 때문일 것이다”라고 논했다.

“나이 팔십에 여주 당숙은/다신 수술 안 받겠다 선언하고/두 해쯤 더 논에서 살다 돌아갔다/누구는 애통해하고/누구는 대단한 결단이네 평하지만/사실은 무서워서 그랬단다/얼떨결에 한번은 했지만/수술받고 깨어날 때 너무 아프더란다/이건 조카한테만 하는 얘기지만/치과도 안 가본 놈이 선뜻 따라가고/남자들 군대도/멋모를 때 한번 가는 거 아니냐고/얼떨결에 세월만 갔지 나이 먹었다고/다 깊어지는 게 아니더라고/죽을 때도 아마 그럴 거라고/얼떨결에 꼴까닥하고 말 거라고/그렇게 얼떨결을 노래하던 당숙은/내년에 뿌릴 씨앗들 골라 놓고/앞뒤 마당도 싹싹 비질해 놓고/그 길로 빈방에 들어 깊은 잠 되었다”(시 ‘얼떨결에’ 전문)

시인은 1959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나 충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한민족문학’ 4집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환한 저녁>, <단절>, <하루만 더>, <얼떨결에> 등과 시평집 <아직도 처음이다>를 출간했다. 한국작가회의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밀양문학회 고문을 맡고 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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