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풀무학교 교사
광천노인대학장
칼럼·독자위원
일곱째, 생활. 검소결벽하셨다. 거의 매일같이 한복을 즐겨 입으셨고, 여름에는 베옷도 입으셨다. 매우 일찍 일어나셔서 방안을 터리개로 털고 깨끗이 청소하셨다. 교실에 오셔도 책상줄을 반듯이 정돈하시고 휴지를 주우신 다음에 수업을 시작하셨다.
연필을 깎을 때도 종이를 대고 깎아서 휴지통에 넣도록 하시며, 책상에 칼자국을 내는 것은 자기 얼굴에 흠을 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한번은 2회 학생들이 당번이 청소를 하지 않고 간 일이 있었는데, 다음 날 ‘청소 하나 하지 못하는 학교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며칠간 전원 퇴교 조치를 한 일이 있었다.
동이 틀 무렵에 뒷산에 올라가셔서 심호흡과 맨손체조를 하시는데 숨을 ‘들이마실 때는 우주가 가슴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고 하셨다.
매일 1교시는 조회시간으로 요즈음의 연구나 교양시간처럼 여러 가지 정신적인 말씀을 해주셨다.
길가에 흩어져 있는 유리 조각이나 휴지를 보시는데도 포켓에 넣으셨다가 학교에 있는 오물장에 묻으셨으며, 학생들한테도 집에 구덩이를 파놓고 주우라 하셨다.
또한 매사에 철두철미하셨다. 모든 일의 기초를 중요시했다. 돌을 쌓을 때, 우물을 팔 때, 교실을 지을 때 기초가 잘못되면 몇 번씩이라도 다시 하셨다.
생각하며 일하라 하시며 생각만 하는 것은 도깨비요, 일만 하는 것은 짐승이다. 그러나 지금은 도깨비나 짐승같은 사람은 많으나 정말 생각하며 일하는 참사람은 없다고 하셨다.
작업시간에는 작업복을 입으시고 모자를 쓰시고 함께 일을 열심히 하셨으며, 이리저리 생각하면서 일을 하셨다. 이북에 계실 때 어머님의 거칠어진 손을 자녀들이 어루만지며 노동의 중요성을 배우셨다고 했다.
과수원을 오래 경영하셨기에 전지 같은 것을 잘하시며 과수원 땅속의 독에 책을 많이 넣어뒀는데 통일이 되면 가서 파보라 하셨다.
풀무학원의 중심은 정신과 정성이다.
이것이 없으면 문을 닫아야 한다고 역설하시며 저희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을 때는 가끔 가신다고 짐을 싸시기도 했다.
여덟째, 학생지도. 내유외강(內柔外剛)의 교육으로 지극한 사랑에 의한 교육이었다. 선악에 대한 판단이 명철하셔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잘한 일이 있으면 극구 칭찬하셨고, 또 사소한 일이라도 잘못하면 지나칠 정도로 심한 책망을 하시며 시정을 해주셨다.
생활과 직결된 지도와 외식이나 타의에 의한 지도가 아니었다. 깨끗함을 강조하셔서 집안 청소와 연료 절약을 위한 굴뚝 막기, 비표분의 상실을 방지하기 위해 퇴비간 짓는 일을 하라고 하셨다.
김빠지고 썩어빠진 유행가를 부르지 말라 하셨다. 술, 담배는 피우지 말라 하시며, 우리의 얼굴은 보면 볼수록 묘하게 잘생겼는데 거기에다가 더러운 뜨물 같은 술을 마시거나 굴뚝에서 까만 연기가 나듯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아홉째, 학생들의 반응. 농촌의 불우한 처지에서 배움의 기회를 잃어버려 학문에 대한 기갈상태에 있던 사람들이라 퍽 열심히 배우고 일했다.
남에게 의뢰하거나 원조를 바라지 않고 독립십을 갖기 위해 자력으로 일도 많이 했다고 생각됩니다.
학생들은 대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2년간 서당이나 가사를 조력하다가 입학해 나이가 많은 편이고, 일의 성과도 컸다. 선생님들의 말씀에 감화, 감동해 농촌에 투신할 각오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란 말처럼 스파르타식과 같은 엄격한 교육에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끝까지 남고 많은 수효가 중도에서 탈락했다.
열째, 고인의 유고. ‘육당(六堂), 춘원(春園)의 밤’은 상당히 긴 글이었으며, 원고지에 옮겨 적은 후 편찬은 못 했다. ‘다시 새날이 그리워’는 조회 시간에 많이 읽어주셨다. 성서인생에 투고하신 것 중에 ‘하늘과 막힌 현대’가 9회로 연재, ‘산 믿음의 새 생애’가 10회 연재로 쓰셨고, 그 외로 시를 많이 적어주시고 외우도록 하셨다.
이상으로 대충 고인이 되신 스승님의 면모를 살펴봤으며, 이외에도 더 많은 소재가 있겠으나 지면 관계로 또 둔한 필치로서 여실히 묘사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결국 선생님의 생활을 요약한다면 진실과 철저 뿐이라 하겠다.
교육 역시 지식의 전달 이상 인간애에 의한 인격 교육, 정신적 연마였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위대한 작품은 우리를 가르치지 않고 우리를 변화시킬 뿐이다’라고 했듯이 위대한 교육은 우리를 가르치지 않고 우리를 변화시킬 뿐이라고 한다면 초창기의 교육이 그러한 것 같다. 교육이 교훈성보다 감화, 감동의 힘이 컸다. 그간 우리는 선생님을 통해서 직접 간접으로 받은 영향이 크다. 저 자신도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점이 많지만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다.
첫째는 선생님의 진실됨이다. 항시 말씀 가운데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하셨다. 도저히 그 진실성을 따를 수조차 없지만, 그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염원하지만, 원하는 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하는 자이기에 마음엔 감동이 따른다.
둘째는 인생관의 확립이다. 풀무학원의 교육의 특징은 신앙에 의한 심성의 변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의 십자가에 이르게 하는 교육, 다시는 예수의 십자가를 지는 교육이어야 한다고 하셨다.
한때 세상적인 향락과 안일한 직업을 꿈꾸던 것이 중2 때 선생님의 그 철통같은 감화력에 저의 일생을 농촌교육에 투신하고자 결심한 바 있었다. 그때 받은 감명으로 지금껏 미력이나마 풀무의 한구석을 지키려는 심정입니다. 그러나 개교 당시의 교육이념을 계승 전달하지 못하는 책임감과 갈수록 너무나도 부족한 자신의 정체가 보여 이제는 감히 교육을 한다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이 선생님께서도 오랜 준비 끝에 54세에, 주 선생님도 40여 세에 학원 교육에 착수하셨는데 너무나도 철부지라서 일생 동안 배운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본연의 목표만을 지향할 따름이다.
셋째는 항시 잊히지 않고 또 잊어서는 안 될 말씀 중에 ‘공부는 죽는 날까지 일생 동안 해야 된다’는 것이다. 물론 풀무학원을 통해서 배운 점이 많지만 항시 감사하는 것은 배움의 징검다리가 되어 준 것이다. 워낙 둔재지만 일생 동안을 배우겠다는 일념만은 변치 말아야 되겠다.
이제 끝으로 개교 16주년을 맞이해 학원 창시자이신 이 선생님의 별세에 즈음하여 우리의 자세와 나아갈 바를 다시 한번 가늠해야 하겠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두 선생님을 통해서 ‘풀무’라는 차를 만들게 하시고 발동을 걸었다. 이 선생님은 3년간으로서 그분이 해야 할 사명과 임부는 다 하신 것이다. 바톤을 이어받은 오늘의 우리는 너무나도 기진맥진 풀무를 끌고 있다. 진정 이 선생님의 돌아가심은 세태에 물들고, 몰리며 나태해진 우리들의 심령에 뜨거운 반성과 경각심을 촉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 우리는 풀무의 사명을 망각하지는 않았을까. 정말 풀무가 한국의 풍토에 심어져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풀무의 발전은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건물, 좋은 시설로 입신출세하는 관문이 돼서는 안 되겠다. 좋은 씨앗을 좋은 밭에 뿌려야 하겠으며, 그리하여 마음 바탕에 진리의 샘이 폭발돼야 하겠다. 이제 풀무학원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할 때이며, 16년간의 유충(애벌레)의 생활에서 탈바꿈해 성충이 되는 단계에 돌입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더 많은 풀무의 군병들이 진리의 갑주로 무장하고 현세대의 불의에 도전해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날 풀무의 사명은 이룩되는 것이며, 영원의 세계에 계신 스승님의 영혼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며, 그것이 곧 스승님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며 다짐하는 바이다.<끝>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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