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빛을 본 홍주성 북문지…
상태바
마침내 빛을 본 홍주성 북문지…
  • 전용식 기자
  • 승인 2008.06.04 15: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주성(북문지) 도로 확장구간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및 현장설명회 개최

▲ 지난 4월 28일부터 발굴 조사중인 홍주성 유적전경 ①유적발굴전경 ②옹성내벽전경 ③옹성외벽전경

(재)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원장 변평섭)은 (주)남강건설이 의뢰한 홍주성(북문지) 도로 확장구간 유적 발굴조사 결과에 대한 지도위원회와 현장설명회를 지난 31일 오전 11시에 조사 현장에서 개최했다.
이날 이종수 책임조사원은 “홍주읍성은 초축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말에서 조선 초에 축성된 이후 홍주목의 읍성으로서 그 기능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는 동학혁명과 의병항쟁운동의 중심지였다”며 “따라서 홍주읍성의 역사적 의의는 아주 크다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금번 발굴조사에서 그동안 유실된 것으로만 알려진 북성벽과 북문지와 관계되는 옹성이 확인된 점은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고 밝혔다.

▲ 조선시대(1871.고종8) 고지도에 나타난 홍주성, 점선부분이 북문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또한 “전체 읍성 범위 중 금번 조사구역의 범위가 일부에 한정되고 상부가 이미 훼손되었으나, 성벽 축성수법과 그 구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며 “이는 향후 홍주읍성의 복원계획 수립과 정비 사업에 있어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설명회를 듣고 현장을 꼼꼼하게 살펴본 뒤 서정석 교수(공주대)는 “조사된 내용에 신뢰가 간다. 일부만 발견됐지만 중요한 자료이다”며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인도로 만든다면 유리로 만들어서 실제로 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백종오 교수(충주대)는 “호서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중요한 유물이다”며 “홍성의 미래를 지켜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5년, 10년 후를 내다보는 체계적인 보존과 활용방안을 함께 모색해야 될 것이다”고 밝힌 뒤 유지관리 면에서 노출을 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했다.
질문시간에 한건택 향토사학자는 “이번 기회에 차라리 주변 땅을 매입해서 북문지 전체를 발굴해서 홍주성과 북문지의 성격을 명확히 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한편 도시건축과 관계자는 “북문지에서 4km만 가면 도청예정지이다. 앞으로 교통이 더욱 복잡해질 것으로 보여 왕복 2차선 도로를 계획했으나 부득이 현재 도로를 유지하고 발굴된 부분은 인도를 개설하여 훼손을 방지하고 나머지 구간은 주차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이어 향후계획에 대해 “이곳은 일방통행이 된다”며 “이번에 발굴된 현장을 조양문 로터리처럼 원형으로 우회하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수정탕에서 북문교까지 가는 도로를 넓히는 방법, 마지막으로 대교공원 앞에서 신호등을 달아 좌회전을 시키는 방안을 고려중에 있다”고 말했다.
한편 (재)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 밝힌 발굴조사 결과 “편축의 체성과 함께 체성 외벽에서 3.5m 바깥으로 북문지의 옹성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함께 확인되어 토층 조사결과 옹성은 체성이 축성된 이후에 축성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순조 23(1823)년 수축기사와 관련하여 그 연관성이 주목된다”며 “홍주읍성은 연약한 지반을 보강하기 위하여 성벽을 쌓기 전 체성은 와편+잔자갈을, 옹성은 모래+점토를 깔고 다진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말하며 “이는 조사구역이 월계천의 배후습지에 해당하여 구지표층이 연약한데 기인한 것으로, 당시 토목기술의 일단을 살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체성은 외벽의 경우는 석축으로, 내벽쪽은 토축의 내탁부로 이루어진 편축성으로서, 그 폭이 약 11m정도로 규모면에서 여타 읍성에 비교해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며 이는 홍주읍성의 전체적인 위용을 짐작하게 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당시 충청지방에서 홍성(홍주)이 정치적, 사회적 중심지였음을 알게 해 주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체성 외벽의 경우 기저부 위로 대형 할석을 사용한 지대석 및 기단석과 함께 1단의 성벽이 확인되었으며, 그 뒤로는 소형의 할석을 뒷채움한 후, 황갈색 또는 암갈색의 사질점토를 사용하여 내탁부를 형성하였다”며 “내탁부에서는 내벽 가장자리에 놓였던 것으로 판단되는 와적열이 약 4m의 간격을 두고 서로 층위를 달리하여 확인되어 내탁부에 있어서도 증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한 “옹성은 내외 협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부는 뒷채움석으로 이루어진 형태이다. 그 폭은 약 8~10m이며, 내벽은 기저부 위로 2~3단의 기단석과 1단의 벽석이 비교적 정연하게 잔존하고 있으나 외벽은 부분적으로만 1단의 기단석이 확인되어 차이를 보인다”고 밝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